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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봉동 삼환아파트에서 바라본 송정지역. 택지개발이 진행돼 아파트 단지와 이를 연결하는 고가도로가 들어서 있다.
   
▲ 북구 송정동 송정사 앞에서 바라본 송정지역 택지개발지구의 개발전 모습. 논과 밭이 어울어진 고즈넉한 모습이다.

 

 

 

 

 

 

 

북구 송정동은 신라때부터 조용한 농촌마을이었다. 하지만 격정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울산의 대표적인 충절의 고장으로 변했다. 바로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충절의 고을을 걸으면서 이 곳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독특한 마을문화를 만나본다.
북구 송정동 울산공항을 조금 지나면 오른쪽에 박상진의사 생가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안내판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송정마을회관이 왼편으로 보이고 철길건널목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지당마을이 시작된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고헌 박상진의사의 생가가 있으며, 밀양박씨의 집성촌으로도 이름이 나있다. 박씨가 울산 송정에 온 것은 현종 5년인 1664년으로 전해진다. 300년 넘게 집성촌을 이루어 왔기 때문에 송정박씨라 불리어질 정도다. 박상진의사 생가터와 조금 떨어진 곳에 박의사의 고조부 휘 성창공의 구택이 있었고, 지금은 양정재라는 정각만 남아있다.

 고헌선생 생가 인근 '양정재'
밀양박씨 집성촌으로도 유명
송애정사 역사공원 이전 복원


 북구 송정동 733번지에 위치한 양정재는 울산예총 회장을 지낸 박종해 선생의 증조부인 박정복 선생의 고택에 부속된 정각이다. 고택은 대지 6,600여㎡의 규모로 자리 잡았었는데 본래 집의 형태는 정방향의 대지를 동서로 나눠 동쪽에는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 본채를 두었고, 서쪽에는 정각채, 즉 양정재를 두었었다. 하지만 1992년 5월 정각채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이 해체되고 현대식 건물이 지어졌다.
 해체되기 전 이 가옥은 남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ㅁ'자형 본채와 T자형 정각채(현 양정재), 그리고 연못을 가지고 있었으나 본채는 새로운 건물로 대체되어 버렸고, 양정재와 연못만 남아 그 옛 정취를 가늠하게 하고 있다.

 

 

   
▲ 송정동 정려각. 절부 서씨의 선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37년 건립된 것으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정려각을 설립했다.

 양정재는 T자형으로 건축됐으며 건축학적으로 연구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양정재 앞 정방형으로 만들어진 연못 중앙에는 작은 섬 모양을 조성해두었는데 이는 도교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옥을 두고 현재도 국내의 건축학자와 연구가들이 종종 방문해 보존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왔다.
 또 이곳 송정동 박씨 문중은 예부터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을에 서당, 봉산정, 괴천정 등 학문을 연마하고 선비들이 시를 읊으며 학문에 정진하던 자오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당으로 사용된 송애정사는 300여년 전부터 농소초등학교 설립 이전까지 교육을 맡아왔는데 이제는 폐허로 변했다. 서당은 박씨 문중의 배려로 고헌 박상진의사의 후손들이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봉산정과 송애정사 역시 역사공원으로 이전 복원될 계획이라고 한다.
 송정동 울산공항 바로 아래 7번 국도변에 정려각이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절부 달성서씨를 기리는 정려각이다. 1937년 조선총독부가 서씨의 선행을 알고 정려각과 비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절부서씨 미담 일본까지 전해져
조선총독부가 직접 비석 세운것
논농사 주업…모심기 노래 구전

 

 

 정려비에는 절부 서씨가 21세에 김씨에 출가해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했으며, 이후에도 온갖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자식을 길러내며 교육에도 열정을 기울였다고 적혀있다. 또 가산을 탕진하고 갈 데가 없어진 남편이 돌아오자 남편을 고치는 데도 정성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사재를 털어 마을 부녀자들 야학도 시키고 불우한 집 아이들에게는 학자금을 주어 취학이 가능하도록 배려했다고 적어 놓았다. 이 같은 사실이 일본에까지 전해지면서 상을 받게 되고, 총독부에서 이 자리에 정려각을 세우게 됐다는 것이다.

 현대 후손들은 이 정려각에 대한 관리를 하지 않고 있어 훼손이 심해지고 있으며, 행정기관 역시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관리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다. 그런데,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이처럼 정려각을 건립한 사례는 전국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여서 충분히 그 배경에 대한 연구와 보존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송정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마을제당인 송정당사에서 동제를 지내고 있다. 송정당사는 송정택지개발지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서 동제를 주관해왔으나 10여년 전부터 인근 송정사에서 대신 동제를 지내고 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화봉제2택지개발지구 내에는 화동당사가 있었다. 현재의 휴먼시아 아파트 212동 바로 뒤편이다. 당나무로 사용되어온 팽나무는 환경영향평가에서 존치수목으로 결정돼 그대로 보존됐으나 당사는 철거됐다. 주택공사는 이주한 주민들의 의견을 따라 조성된 공원부지 내에 비석과 같은 표지석을 세웠다.

 화동당사 역시 원래 논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으며, 인근에는 택지개발 이전에 30여채의 가옥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옛 지명은 '당수나무 배기'. 당수나무는 동제당목, 배기는 흔히 박혀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예전에 세 아름드리나 되던 포구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죽고 없다고 한다.
 송정마을은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를 갖고 있다. 주민들 역시 논농사가 주업이었다. 전해지는 노래 역시 모심기에 관한 노래들이다. 못자리하는 소리와 모심기 소리가 전해지고 있으나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글=박송근기자 song@사진=유은경기자 usy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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