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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정신과 의사이기는 하지만 만약 큰 재난의 현장에 있게 된다면 정신과 교과서에 있는 대로 소위 '이상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재난을 겪고 나서 신경증이 안 생길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할 수 없으며 회의적인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요즈음은 정말 묵시록이 현실화 되고 있는 것인가 할 정도로 리비아 내전, 일본지진 같은 큰 재난들이 연속적으로 터지고 있어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최근의 의학발전은 정말 눈부시다. 예컨대 전염병에 대한 것, 영아 사망률의 감소 그리고 상상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해진 진단기계들도 그렇다.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많다. 오히려 환자들이 더 많아지고 치료도 여전히 어려운 많은 질병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외상후자극장애라는 이름을 가진 외상성신경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상후자극장애란 진단용어가 나오게 된 것은 월남전에서 수많은 전쟁 신경증 환자가 발생했고 그들을 연구하고 치료하면서 새롭게 알려진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전의 프로이트 시절에는 '탄환충격'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 때와는 다른 양상도 보이며 더 많은 숫자가 그것도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는 인상이다.

 신경증(노이로제)연구의 시작은 브로이어와 프로이트부터이며 히스테리 연구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히스테리 환자라는 것이 '정신적 외상' 즉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고통스럽고 불쾌한 기억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고통스럽고 불쾌한 기억이라. 그렇게 따진다면 외상성신경증에서의 기억은 더 충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드도 '탄환 충격'이라고 이름 붙여진 신경증을 연구 했는데 왜 그들이 전쟁에서의 끔찍한 충격에 대한 꿈을 반복해서 꾸느냐는 것이었다. 그 자신의 '쾌감원칙'에서 생각해보면 모순되는 것인데 말이다. 그렇게 반복해서 충격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을 '반복강박'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음 속에 과거를 되살리는 '불안'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그 일이 있고 난 후 충분한 방어벽이 쌓여질 때까지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계속해서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개봉한 디어헌터라는 영화가 있다. 월남전에서의 이야기이며 바로 전쟁신경증을 다루었던 영화였다. 그가 왜 터무니 없는 리볼버 권총게임에 빠져 들며 한 발이 장전되어 있어 어쩌면 발사될지 모르는 총알에 그 자신을 맡기게 되는가를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그 영화에서의 주인공은 자신을 보호할 방어벽을 쌓지 못하고 총알에 희생되고 만다.

 이런 전쟁 상황이 아니래도 정말 많은 영역에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외상이 일어난다.
 고문, 강간, 테러리즘, 사고, 그리고 중요한 사람이 갑자기 사망하는 것도 외상이다. 우리나라는 6·25라는 큰 전쟁을 겪었지만 그것에 대한 자료는 별로 없고 그 후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사고 같은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많은 외상후 자극장애를 경험하고 있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런 충격적 사건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꿈을 꾸거나 플래시박이라는 그 사건을 회상적으로 반복하게 되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런 충격적 기억의 침입으로 고통받다가는 다시 기억을 차단하기라도 하듯이 '멍멍'하게 해리상태로 되거나 약물남용으로 '신경을 죽이듯' 지내는 고통이 교대로 반복된다.

 치료는 어차피 충격적 외상 경험을 다시 불러일으키게 되는 상담작업을 거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그 충격에 대한 극복이 시도되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때 사실 그 희생자가 어린이인 경우는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 되겠는가. 일본 지진에서 영향을 받은 어린이들이 바다그림을 그려도 까맣게 그린다는 가슴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이의 경우는 충격적 외상이 정서발달을 어렵게하여 충격에서의 감정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중고통을 해결해야 한다.

 성폭행에 의한 정신적 외상도 드물지 않게 보게 되는데 외국의 한 환자는 자신의 몸이 기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기계 안에서 살기 싫다고 말하며 샤워를 절대 하지 않았는데 그능 그의 목 아래로는 몸이 없기 때문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인간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절망감 같은 것을 갖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한다. 만약 그 고통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그 고통의 골짜기가 깊은 만큼 극복한 정신의 봉우리도 또한 높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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