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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박혁거세가 '금자'를 숨겼다는 금척리 고분군은 아직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지않아 2,000년의 시간을 의문속에 품은 고즈넉한 풍경이다.

꽃 잎 날리던 봄날의 한 때는 금세 과거형이 된다. 세 계절을 기다려 피운 절정의 삶은 길어야 일주일이다.  그래서 꽃은 더욱 더 찬란하다. 가는 길이 그렇게 모두 봄빛이다. 햇살도 바람에도 봄이 올망졸망 달렸다. 문득문득 스치는 풍경에 보리들이 푸르고 나무 끝에는 연초록의 향연이 고개를 내민다. 그 향연의 중간에 삶과 죽음이 이미지를 함께 가진 경주 건천이 있다. 경주의 서악인 선도산 너머 너른 들판에 자리 잡은 읍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읍이 죽음과 삶의 이미지를 함께 가졌다. 그것들은 절대왕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왕의 금자를 묻은 '금척리고분군'

그곳에는 아주 오래된 과거의 시간이 현존한다. 2,000년전의 무덤들이 모여 있다.
 동경잡기에 따르면 금척(金尺)은 말 그대로 금으로 만든 자다. 예전 박혁거세가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금자는 아픈 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리는 신통한 물건이었다. 신라의 3대 보물로 아낄만큼 소중하게 다뤘다. 중국의 황제가 이 보물을 탐냈다. 신라인들은 빼앗기기 싫어 땅에 묻어 버리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곳이 금척리다. 파낼 것을 염려한 사람들이 여러 개의 다른 봉분을 만들어냈다.

 4만여평의 벌판위에 무려 50여기가 서로 기대거나 홀로서서 오랜 시간을 건너왔다. 무덤들은 2~3m에서 10m에 이르는 것까지 혼재돼 있다. 경주시내의 고분들과는 달리 부드러운 잔디를 가지지 못한 고분들은 좀 더 거친 윤곽으로 '금척리 고분군'이란 명패를 달았다.
 1952년 한국전쟁 중 도로 확장으로 파손 된 두기의 무덤에서 금귀걸이, 은 허리띠, 곡옥등의 유물이 나왔다. 1976년과 1981년에 발견된 소고분들에서는 세환식, 금귀걸이, 호박환옥, 토기등도 출토됐다.  신라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에서 보이는 것들로 단순히 금척을 숨기기 위한 것 만은 아닌 모양이다.

   
▲ 궁녀를 밤바다 홀렸다는 노승의 설화가 절집 마당에 서면 때로 사실처럼 들리는 주사암. 절 입구의 큰 바위가 마치 일주문인양 서있다.

 무덤과 관련해서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아직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무수한 역사의 주장들만 의문의 자리를 채우고 있다.
 금척에 대한 비밀은 신라의 충신 박제상에게 전해졌고 영해박씨 문중에서만 대를 이어 지켜왔다. 영해박씨 문중과 친분이 돈독하던 김시습은 징심록과 금척기를 읽고 '징심록 추기'라는 책에서 금척에 관한 철학적이고 미묘한 수리를 적기도 했다. 금척은 혁거세 거서간 대에서 이미 이 세상의 물건의 아니었지만 그것의 상징성은 조선 태조와 세종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아직 밝혀내지 못한 무덤 속의 시간은 아득하지만 그 곁에서 사람들은 삶은 여유롭다. 농부들은 그 곁에서 포도밭을 손보고 무덤 곁에는 고목들이 편안하게 뿌리를 내렸다. 가끔 사람들은 울타리도 없는 고분사이를 거닐며 포근한 휴식을 얻는다. 삶은 걸어가는 것이고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는다. 무덤은 한 사람이 걸었던 시간의 마침표다. 2,000년 전에 만들어졌던 무덤은 이제 고즈넉한 풍경으로 남았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 '여근곡'


금척리 고분군에서 영천 쪽으로 달린다. 가로수들은 약하고 작으나 하나같이 화사한 꽃잎들을 피워 올렸다. 왼편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오봉산(640m) 줄기다. 대여섯개의 봉우리가 올망졸망 솟은 오봉산은 남서쪽의 부산(富山.729m) 줄기와 닿아 있다. 두 산줄기가 이어지며 감싼 분지와 능선이 신라 문무왕 때 쌓았다는 둘레 7.5㎞의 부산성이다. 득오가 죽지랑을 그리는 향가 '모죽지랑가'를 이곳에서 지었다.

 그 아래 한켠에 신평리가 있다. 신평마을 뒷산에 여성의 국부와 흡사하게 생긴 골짜기가 있다. 여근곡(女根谷)이다. 여근곡은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미리 알아낸 것 세가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 5년, 추운 겨울 도성 인근 영묘사 옥문지에 때 아닌 개구리 떼가 사나흘 밤낮을 울어대니 사람들이 모두 불길한 징조라 여겨 여왕에게 알렸다. 이 말을 들은 여왕은 정병 2,000명을 뽑아 여근곡을 찾아가서 적병을 치도록 명령했다. 군사들이 이르러 보니 과연 백제 군사 500명이 매복해 있어 그들을 포위하고 전멸시켰다. 감탄한 신하들이 궁금해 하자 여왕은 개구리는 병사의 형상이요, 옥문은 곧 여근이 된다. 여자는 음이고, 백색이며 서쪽을 말함이라. 따라서 서쪽 여근곡에 적군이 있음을 알았으며, 남근은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므로 적군을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이 힘겨운 왕권 수호의 한 방편으로 활용한 땅인 셈이다. 지혜로운 선덕의 통치는 이어졌고 세력을 키워 마침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조했다.
 여근곡은 멀리서 보면 볼수록 더 선명하게 보인다. 유독 이곳에만 소나무가 많아 한겨울에도 그 형체를 알아보기 쉽다. 여근곡은 뒤쪽의 오봉산이 서쪽을 가로막은 골짜기 안에 위치해 햇빛이 부족해진다. 양의 대표적인 것이 태양이다. 자연스럽게 음기가 셀 수 밖에 없다. 이곳의 음기는 너무 세 경주로 부임 가는 관리조차 이곳을 보지 않으려 둘러갔고, 서울 과거길에도 피해가는 길이었다 하니 예전부터 그 유명세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마을 뒤편에 새로 지어진 절집마당을 거쳐 여근곡으로 올라 갈 수 있다. 전설처럼 가운데 맑은 샘이 자리 잡고 있다. 한 때 이 샘물을 휘저으면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는 소문에 손을 못대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의 상수도와 여근곡 아래 절집에서 호스를 묻고 흔적만 겨우 남아 목만 축일 수 있게 해놓았다.

   
▲ 주사암 영산전의 빛바랜 단청이 풍기는 고고한 멋은 오랜 시간을 품은 온기로 가득하다.
 

#김유신과 마당바위 그리고 주사암

여근곡을 거슬러 한시간정도 오르면 오봉산 정상 부근에 절벽에 작은 절집이 자리 잡고 있다. 일주문 대신 큰 바위가 양쪽으로 자리 잡은 주사암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주암사(朱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하니 그 지닌 시간만 천년을 넘었다. 그 긴 시간에 비해 절집이 가진 당우들은 단출하다. 영산전과 삼성각, 종각, 요사채가 전부다.

 그러나 영산전의 낡고 빛바랜 단청이 풍기는 고고한 멋은 으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고 아담함에 비해 풍기는 당당함은 그 긴 시간을 견뎌온 어떤 이름 모를 힘이다. 지붕을 받치고 선 오랜 나무들의 질감이 살아있다. 기둥을 만지면 나무가 보낸 오랜 시간들이 건너온다. 수백 년의 봄볕을 간직한 따뜻함이다. 남쪽을 제외하고 모두 바위에 둘러싸여있는 아늑함이 만든 온기다. 들리는 것이라곤 염불소리와 산새의 울음뿐이다. 노승의 포행에 봄 햇살이 바스락거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창건 설화가 전해온다. 신라 때 한 노승이 밤마다 자신이 사는 동굴로 임금이 아끼는 궁녀를 데려갔다. 화가 난 왕이 추궁하자 궁녀는 어딘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왕은 궁녀에게 또 끌려가면 주사(朱沙)로 굴 옆 바위에 표시를 하라고 일렀다. 궁녀가 주사병을 던져 바위에 물을 들여놓자 왕은 군사들을 동원해 동굴을 에워쌌다. 그 순간 노승이 주문을 외우니 순식간에 신병(神兵) 수만 명이 등장하여 노승을 보호했다. 왕은 부처가 노승을 보호함을 깨닫고 노승을 국사(國師)로 모신 뒤 바위 옆에 절을 지어 주사암(朱砂庵)이라고 했다. 현실적이지 못하지만 절집 마당에 서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런 풍광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은 이성이 견고함이 아니라 감성의 미세한 결이다.

 종각 아래쪽으로 난 오솔길은 아스라한 낭떠러지를 끼고 능선으로 이어진다. 50m쯤 이어진 길 끝에 깎아지른 바위가 나타난다. 김유신 장군이 바위 위에 쌓아둔 보리로 술을 빚어 군사들에게 먹였다는 지맥석(持麥石)이다. 가파른 경사면에 수직으로 선 바위는 웅장하나 그 위에 올라서는 사람은 아찔하다. 바위 위쪽은 10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고 편평하다. 그래서 마당바위라고도 불린다.

 발밑으로 이제 막 잎을 피우는 연초록의 바다가 깔리기 시작했다. 좌우로 열린 시야는 넓고, 때 마침 바람이 시원하다. 왼쪽으로는 부산성의 흔적이 또렷하고, 오른쪽으론 산내로 가는 길이 굽이굽이 접혀 산을 넘는다.
 얼마 전 이곳을 배경으로 드라마도 찍었다. 선덕여왕이 죽음을 맞이한 곳이었고, 동이도 촬영을 했다. 주사암 앞까지 차 한대가 다닐 만한 비좁은 시멘트길이 나 있어, 차로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매우 좁고 가파른데다 굽이가 심해 조심해야 한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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