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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기 시인

섣달 늦은 밤, 눈이 내리고 가로등 비추는 길
새하얀 눈 위에 담뱃재
바둑이와 같이 간
어느 남자가 아니 어느 여자가
무슨 결심을 하던 중이었을까.
아무 일 없이 해가 바뀌더니 강이 얼었다.
유람선이 멈췄다.
물길 오십 리
얼음을 따라 강변도로가
저도 얼어 눈물 보이는 아침
잡혀간 친구…이런 말 입에 올릴 일 더 없으리라 믿었는데
그 집 통장에 돈 넣을 일 더 없으리라 믿었는데
눈이 녹을 때
강이 풀릴 때
청청한 새벽이 올 때까지…이런 옛 맹세가 속절없다.

■ 시작노트
수업이 파한 늦은 오후의 교정은 언제나 적막했다. 나는 붉은 샐비어가 피는 초여름 무렵을 가장 좋아했다. 그것도 학생들이 돌아간 방과 후의 적막 속에 핀 붉은 꽃을 말이다. 한가로운 교정의 샐비어가 지금도 그립다. 내게는 그 풍경이 하나의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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