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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

고려 말 정몽주는 언양 요도에서 2년여 귀양살이를 했다.
39세 때인 1375년에 귀양와서,
41세 때인 1377년 3월에 개경에 돌아갔다.
울산으로서는 귀한 인연이었다.
고려를 지키려는 그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이성계 일파의 야욕은 날로 높아만 갔다.
조선이 개국되는 1392년 7월을 불과 3개월여 앞둔 4월 초.
부상당한 이성계를 찾아 병 문안한 뒤,
그의 아들 방원과 자리를 함께 했다.


절창 '봄(春)'등을 지은 다정다감한 시인

   
▲ 고려 말 언양 요도에서 귀양살이를 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귀양살이의 역경을 시로 승화해 작품을 지었다. 사진은 산세와 계곡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경으로 마치 거북 한 마리가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는 반구대에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영모비. 유은경기자 usyek@ulsanpress.net

이방원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란 '하여가(何如歌)'를 읊으며, 정몽주의 마음을 떠봤다.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란 '단심가(丹心歌)'를 부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귀갓길에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다. 역설적이게도 조선이 건국되고 훗날 3대 임금 태종이 된 이방원이 정몽주를 만고의 충신으로 존숭했다.


 정몽주는 정치가로서의 위상이 너무 높아 상대적으로 학자와 시인으로서 모습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절창을 남겼다. <봄비가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밤 되면서 조금씩 소리 나는구나./ 눈 녹아서 앞 시냇물 불어날 테고/ 풀싹들도 얼마쯤 돋아나겠지. (春雨細不滴/ 夜中微有聲/ 雪盡南溪漲/ 多少草芽生)> 대표작의 하나인 '봄(春)'이란 시다. '동문선(東文選)'과 '기아(箕雅)' 등의 시선집에는 '춘흥(春興)'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후대 문인들이 봄날의 내밀한 흥취를 느낄 수 있어서, '흥(興)'자를 덧붙여 제목을 '춘흥(春興)'이라고 했다.
 이 시에서 절개와 지조를 지닌 근엄한 성리학자요,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있으랴. 하물며 약육강식의 논리만 요동치는 외교무대와 생사의 전장을 누빈 풍모를 짐작이나 할 수가 있으랴. 다정다감한 시인의 모습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똑같이 성리학을 탐구했지만,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주리(主理)적인 송시풍(宋詩風)에 가까운 경향을 보였다면, 그는 주정(主情)적이고 섬세한 표현이 주조를 이루는 당시풍(唐詩風)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음 시에서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가 있다. <강남의 아가씨가 머리에 꽃을 꽂고/ 웃으며 벗을 불러 꽃 핀 물가에서 노닐었네./ 노 저어 돌아오려니 해는 막 저무는데/ 원앙새 짝지어 날아 시름이 그지 없네. (江南女兒花揷頭/ 笑呼伴侶游芳洲/ 蕩    歸來日欲暮/ 鴛鴦雙飛無限愁) '강남곡(江南曲)'>. <빗 속이라 오랫동안 울적했던 회포를/ 한가위 달 아래서 풀어보자 했었지./ 마침 가을바람이 구름을 몰고 가버리자/ 옥같은 얼굴이 마치 친구가 찾아온 듯하네. (久將鬱鬱雨中懷/ 擬向中秋月下開/ 賴有西風掃雲去/ 玉容如見故人來) '한가위 달(中秋月)'>.
 

목숨을 건 사행과 전장을 누빈 순절의 생애

 

   
▲ 서기 1679년에 울산 유학의 연원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서기 1964년 사액을 받은 구강서원.

 정몽주는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영일(迎日). 아버지 정운관(鄭云瓘)과 어머니 영천이씨의 장남으로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년) 12월 22일 경북 영천 동쪽 우항리에서 태어나, 공양왕 4년(1392년) 4월에 조선을 세우려는 이성계의 아들 방원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21세 때 감시(監試)에서 3등으로 급제한 뒤, 24세 때 과거에서는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의 삼장시(三場試)에서 모두 장원으로 합격했다. 이태 뒤에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됐다. 31세 때 예조정랑으로서 성균관 박사(博士)를 겸했으며, 성균관 사예(司藝)와 직강(直講)을 거쳐 성균관 사성(司成)에 올랐다. 주자의 경전주석인 '사서집주(四書集註)'에 조예가 깊었으며, 경전강의는 탁월했다. 당시 성균관 대사성 이색(李穡)은 "그의 논리는 종으로 설명하거나 횡으로 설명하거나(橫說竪說)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시조로 추대돼야 할 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38세 때 경상도 안렴사에 임명됐으며, 그 해에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했다. 39세 때 예문관 직제학에 이어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됐다. 그해 권력을 농단하던 이인임의 배명친원(排明親元) 정책에 맞서 박상용과 김구용 등 10여명과 함께 이인임을 탄핵했으나, 언양 요도(蓼島)에 유배됐다. 요도는 감천(坎川)과 남천(南川)의 두 물줄기가 언양을 감싸고 흐르다가 합쳐지는 곳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삼각주. 마치 섬처럼 보여 요도로 불려졌다. 정몽주는 작천정과 반구대를 즐겨 찾았다.
 반구대를 찾은 길에 '언양에서 중양절에 감회가 있어 유종원의 시에 차운하다(彦陽九日有懷次柳宗元韻)'란 시를 썼다. <나그네의 마음 오늘따라 더욱 서글퍼/ 장기(   氣) 찬 바닷가 산에 올랐네./ 뱃속에는 나라 그르친 글만 있을 뿐/ 주머니엔 목숨 늘릴 약이 없구나./ 용은 세밑이 걱정스러워 깊은 골에 숨었고/ 학은 맑은 가을이 좋아서 푸른 하늘에 오르네./ 손으로 국화를 꺾으며 한껏 취하고보니/ 구슬 같은 미인은 구름 너머에 있구나.> 미인은 개경에 있는 임금을 가리킨다. 우리 나라에서 임금을 미인으로 비유한 첫 시인이 포은이다. 그의 시 '사미인사(思美人辭)'에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 숙종 38년(1712) 언양지역 유생들이 포은 정몽주를 추앙하여 세우고 제사를 지낸 반구서원.

 변방 언양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마음이 결코 편치 않았다.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그 무렵에 지은 시에 드러나 있다. <바른말 하다가 나는 조정에서 쫓겨 나와,/ 이 좋은 성대에 한숨만 쉰다네./ 푸른 물은 참으로 여유롭고/ 푸른 산은 애초에 시비가 없다네./ 갈매기 노니는 물결은 깊고 넓은데,/ 대궐을 바라보니 멀고 높기만 하네./ 풍운의 좋은 기회 이미 저버렸으니,/ 더 이상 임금의 은혜를 받기 어렵다네.>

 


 41세 때인 1377년 3월에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갔다.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려는 친원파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략을 걱정해서 일찍이 나흥유(羅興儒)를 사신으로 보냈으나, 겨우 목숨만 구해 돌아왔다. 9월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사신으로 가서 11수로 된 연작시를 지었다. <섬나라에 봄빛이 찾아오건만/ 하늘끝 이 나그네는 떠나지 못하네./ 풀빛은 천리 이어 푸르고/ 달빛은 두 곳에 함께 밝은데,/ 유세길에 황금이 다 떨어져/ 고향 그리움에 흰머리만 생겨나네./ 대장부가 사방에 큰 뜻을 품은 것은/ 공명을 이루기 위해서만은 아닐세.> 다음해 7월 포로로 잡혀갔던 수백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외교관으로 처음 나선 것은 36세 때인 1372년 3월. 명나라에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했다. 정사(正使) 홍사범은 익사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명나라가 귀국을 도와줘 이듬해 7월 돌아왔다. 그 뒤에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5차례나 더 다녀왔다. 명나라와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전장에 처음 나간 것은 27세 때.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을 따라 영흥에 가서 여진정벌 전쟁에 참가했다. 그때 이성계를 처음 만났고, 다음해 이성계를 따라 역시 여진정벌에 나섰다. 44세 때인 1380년에는 왜구가 침략하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전투에 나서 크게 이겼다. 세 해 뒤에도 동북면 조전원수로 역시 이성계를 따라 전투에 나섰다. 운봉전투에서 대승한 뒤 개선하면서, 전주 망경대에 올라 시를 지었다. <천길 높은 산언덕에 돌길이 돌아들어/ 올라보니 장한 마음 가눌 길이 없네./ 푸른 산 희미한 곳이 부여국이고,/ 누른 잎 흩날리는 곳이 백제성일세./ 구월의 드센 바람이 나그넬 시름겹게 하고/ 백년의 호기가 서생을 그르치게 하네./ 하늘가에 지는 해가 뜬구름에 덮여버리자/ 서글프게도 개경을 바라볼 길이 없네.> 전주는 이성계의 본향지. 아이러니다.


 1389년 11월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웠을 때에는 동조했다. 1390년 11월에 수문하시중에 올랐다. 그 무렵부터 노골적으로 새 왕조를 세우려는 야심을 드러내는 이성계 일파와 대립했다. 1392년 2월에는 고려의 정치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법전 '신율(新律)'을 편찬했다. 그해 3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세자 일행의 귀국을 영접하려 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에 부상을 당하자, 그것을 기회로 대간(臺諫)들과 함께 이성계의 추종세력인 조준과 정도전, 남은 등을 귀양보냈다. 4월 초에 이성계의 집으로 문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방원에 의해 죽고 이방원에 의해 전설 되다
 조선이 건국하고 훗날 3대 임금 태종이 된 이방원은 즉위 5년(1405년)에 정몽주를 영의정·익양부원군으로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로부터 그의 절의정신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세종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 충신편에 수록됐다. 중종 12년(1517년) 9월에는 문묘에 배향됐다. 그를 모신 서원건립도 잇따랐다. 최초로 명종 10년(1555년)에 옛 집터인 영천 부래산 아래에 서원이 세워졌다. 임고서원으로 사액됐다. 1573년 개성 숭양서원, 1576년 용인 충렬서원, 1588년 영일 오천서원과 상주 도남서원, 1677년 울산 구강서원, 1713년 언양 반구서원 등 13곳에 세워졌다.


 그의 묘는 태종 6년(1406년) 3월 황해도 풍덕군에서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으로 옮겨졌다.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됐다. 신도비는 숙종 25년(1699년)에 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수증이 글씨를 쓰고, 김수항이 전액을 올리는 등 당대 최고의 명사가 제작에 참여해서 금석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 제1호.


성리학 비조(鼻祖)로 조선 사림파의 주춧돌

 

   
▲ 귀양살이를 한 언양 어음리의 옛 요도(현재 KTX역사로 들어가는 길목).

 정몽주는 이색의 찬사대로 우리 나라 성리학의 비조(鼻祖)로 꼽힌다. 그럼에도 그의 학문적인 세계는 평판만 풍성할 뿐, 탐구할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문하에서는 걸출한 인재가 나왔다. 길재와 이숭인, 권우 등이 대표적이다. 권우는 세종대왕의 스승이 됐다. 길재는 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큰 봉우리를 형성했다. 정몽주는 조선 사림파의 주춧돌이었다.

 


 그의 문집 '포은집(圃隱集)'의 초간본(初刊本)은 아들 종성(宗誠)과 종본(宗本)이 작품을 수집해서 세종 21년(1439년)에 목판으로 간행됐다. 전해지지는 않는다. 다음에 나온 것이 신계본(新溪本). 현손 세신(世臣)이 중종 28년(1533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것으로, 현존하는 최고본이다. 포은집의 이본(異本)은 15종 가량 되며, '단심가' 외에 300여 수의 한시가 수록돼 전해지고 있다.
 그는 정감 어린 시를 많이 썼지만, 평자들로부터 전체적인 시풍은 '호방표일(豪放飄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집의 서문을 쓴 하륜과 노수신이 그런 평가를 했고, 남용익은 '호창(豪暢)'하다고 했다. 김석주는 '맑은 물에 뛰노는 물고기요, 하늘 높이 나는 새(躍鱗淸流 飛翼天衢)'라고 평가했다. 가식 없이 거침이 없고 활달한 그의 시 세계를 적절히 지적한 셈이다.
 유교사상으로 국가개혁을 이뤄 고려왕조를 지키려던 정몽주. 비록 그 꿈은 실현하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은 조선왕조를 거쳐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호방하고, 또 민생을 보호하고 안정시키려는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표출한 시 세계가 본보기가 아닌가. 예나 이제나 인재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가진 울산으로서는 그를 배향한 서원 두 곳을 가졌다면 문풍진작에 힘쓰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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