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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는 말이 없다. 그렇다고 승자는 목청에 힘을 주라는 것은 아니다. 승자도 말을 아껴야 한다. 말로 토해 낼 것들을 밤을 도와 숙고하고 아침이 되어서야 온몸으로 보여주면 된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우리 사회는 축제의 뒤풀이보다 선거결과의 책임론 공방에 매몰된다. 패자는 말이 없다는 이야기도 승자에 대한 축하보다 패자에 대한 연민이 앞서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메뉴다. 선거가 끝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승리보다 값진 패배니 아름다운 승복이라는 말은 패자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패자에게 보내는 화려하거나 광고카피 같은 수사는 언론이나 평론가들의 화장술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울산에서 치러진 재선거는 여권과 야권이 무승부를 기록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무승부 기록에 대해 시민들은 아무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야권의 승리, 그것도 상당한 승리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51대48, 48대43이라는 수치가 말해준다.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던 중구는 개표 막판 뒤집기 국면까지 가는 상황이었고 시당은 물론 중앙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동구는 뚜껑을 열자 속수무책이었다. 울산을 노동성지로 인식하는 민주노동당은 북구에 이어 동구까지 수장을 얻어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민노당식 지방자치를 처음 하는 것이 아닌 지역이 울산이다. 그래서 민노당의 어깨는 더 무겁다. 과거 민노당 단체장 시절의 공과를 제대로 살피고 구민을 위한 지방정치를 제대로 실현해 주리라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번 재선거에 대한 평가는 확연하다. 한나라당의 참패다. 아니 현 정부와 여권에 대한 민심의 경고다. 여권 지도부는 그 경고의 수준이 단순한 냉소가 아니라 엄정한 심판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울산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분당 을이나 강원도에서 드러난 민심의 향배보다 울산의 상황이 더 명확할 수 있다. 이는 야권이 승리한 동구보다 여권이 승리한 중구에서 잘 드러난다. 무난한 승리를 점쳤던 중구는 막판 혼전 양상을 보였다. 결과는 51대48이지만 한나라당의 현주소가 그대로 드러난 한판이었다. 중구는 자타가 공인하는 울산의 전통적인 여권 우세지역이다. 그런 곳에서 박빙의 승부를 보인 것은 상대후보의 비중이 높아서도 아니고 인물 탓도 아니다. 여권이 보여온 과거의 행적이 누적된 결과로 보는 것이 맞다.

 동구는 어떤가. 경선 때부터 말 많고 탈 많았던 한나라당은 울산시 국장을 지낸 여성후보를 참신한 카드라며 내밀었다. 지역 최대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았고 당 지도부의 지원사격도 남달랐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한나라당의 깃발이면 누구든 승리할 수 있다는 오만함에 민심은 '아니다'고 마침표를 찍었다. 그 마침표의 힘은 변화다. 재선거의 원인제공자가 누구인지 너무나 뻔 한 일인데 여기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없으니 민심이 움직일 리가 없다. 그 부동의 민심이 변화를 택했다. 변화하지 않으면 또다시 재선거 같은 부끄러운 과거가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민심도 읽고 있다는 증거다.

 분당 을에서 드러난 한나라당의 현주소도 비슷한 대목이다. 1년짜리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판에 여야 전직대표가 팔을 걷었다. 정운찬으로 시작해 후보군을 두고 계파간 곁눈 질만하던 한나라당은 우선 후보선정에서부터 실기했다. 그 절묘한 타이밍을 민주당은 놓치지 않았다. 현직대표의 1년짜리 재선거 도전이라는 무리수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결격사유가 있는 지역구에 마지막 땜질을 하는 재보궐 선거가 정권심판이나 내년총선, 그리고 대선까지 가늠하는 큰판으로 변질됐다. 물론 파이를 키운 것은 한나라당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키운 파이에 영양보충은 민주당이 한 셈이다.

 모르긴 해도 한나라당은 이번 재보궐 선거를 괜찮은 싸움으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분당사람이 된 강재섭 전대표나 현장에서 바바리 옷깃을 날리던 엄기영 전 MBC 사장, 총리후보까지 오른 김태호 전 경남지사 등 후보군의 중량감이 야권을 압도했다는 판단도 있었다. 그렇다보니 적어도 2대1, 괜찮다면 3대0 압승까지 내심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자만이 오늘의 결과로 나왔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여권의 내부는 진창이다. 대선유력후보라는 인사는 "선거는 지도부가 하는 것"이라며 선거전 내내 뒷짐을 지다 참패로 끝나자 "책임을 통감한다"는 말만 남기고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정부는 어떤가. 정부는 정부대로 내놓는 정책마다 지역갈등을 부채질하는 판이다. 그래도 준치라는 믿음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서 민심의 반란은 시작됐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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