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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공업센터 정유공장 전경. (1963년)

정부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이틀 앞둔 1962년 2월 1일 오후에 50만 인구가 자리잡을 울산의 공업센터와 문화도시를 위한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신문이 보도한 내용을 살펴 보면, 4,900만평의 부지에 정유공장과 종합제철소 등이 들어설 공장지구와 상가지구, 주택지구를 만드는 것으로 돼 있다.

 울산에 건설될 공업시설은 ▲정유공장[1차 계획기간에 일산(日産) 3만 배럴, 장기계획은 6만 배럴] ▲석유화학공장 ▲제3비료공장(질소질 9만5,000톤 생산) ▲종합제철소[선철(銑鐵) 1차 25만톤, 장기 70만톤] ▲화력발전(6만6,000㎾) 등이다. 이를 위한 건설비용은 1962년-66년의 1차 계획기간에는 512억환과 외화 1억2,400만달러가 투입되고, 장기 계획기간에는 685억환과 8,360만달러가 소요된다.
 전력수요는 정유공장이 1차 계획기간에 10만톤, 장기 계획기간에 30만톤이 필요하다. 수송량은 해상이 1차 계획기간에 120만톤과 장기 기간에 80만톤 등 200만톤이다. 육상은 1차 200만톤, 장기 240만톤 등 440만톤을 계획하고 있다.

 이 공업화계획과 함께 도시계획으로서 1차계획에 10만명, 장기 계획기간에 50만명을 수용해야 할 것으로 예상하고 주택건설물량을 짰다. 1차에 아파트 9동(棟)과 독립주택 1만8,500호(戶), 외인주택 40호, 외인아파트 2동을 지어 10만여명을 수용하기로 했다.
 또 관광사업으로 목도에 유원지, 일산에 해수욕장, 울기등대에 조간지(釣竿地) 등을 꾸미기로 했다. 이같은 대공업센터와 문화도시를 만들기 위해 전답 410정보와 가옥 720호가 매수 및 이전케 됐다고 보도했다.

 마침내 1962년 2월 3일 오후에 역사적인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거행됐다. 당시 신문 보도내용을 살펴 본다. <울산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이 2월 3일 오후 1시 15분 울산읍에서 7㎞ 떨어진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에서 성대히 베풀어졌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을 비롯한 10여 최고위원, 송요찬 내각수반을 비롯한 정부 각료, 샹바루 주한 외교단장을 비롯한 각국 외교사절과 서울에서 내려 온 200여명의 내빈, 그리고 네 번에 걸쳐 무료로 임시열차를 타고 온 3만명을 헤아리는 현지 및 인근 주민들이 이 식전(式典)에 참석하여 울산고을은 사상 처음으로 맞는 성사(盛事)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식은 군악대의 우렁찬 주악으로 시작되어 국토건설청장의 개식선언과 국민의례, 경남지사의 혁명공약낭독, 그리고 경제기획원장의 건설계획 개요 설명과 내각수반의 식사가 있었다. 송요찬 수반은 식사를 통해 "국내 최초의 공업센터로서 울산지구의 종합건설계획은 경제재건에 중추적 거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단상에 나와 엄숙한 어조로 "대한민국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천함에 있어서 종합제철공장 비료공장 정유공장 및 기타 관련 산업을 건설하기 위하여 경상남도 울산군의 울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청량면의 두왕리 범서면의 무거리 다운리 및 농소면의 화봉리 송정리를 울산공업지구로 설정함을 이에 선언합니다"고 선포했다. 박 의장은 치사를 통해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을 울산에 실현하려는 것이라고 울산공업센터 건설의 의의를 강조하면서 울산공업도시의 건설이야말로 우리 나라 4천년래의 빈곤을 타파하고 부흥시키는 판가름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식은 주한 프랑스와 독일, 미국 대사 등 외교사절의 축사와 기념품 증정이 있었고, 울산여고 합창단의 '국토건설의 노래' 합창이 있은 다음 박정희 의장의 기공발파로 울산공업도시는 우렁찬 첫 걸음을 내디뎠다. 뒤를 이어 송대순 대한상의 회장의 만세삼창과 국토건설청장의 폐식선언으로 끝을 맺었다. 식이 끝난 뒤 박정희 의장 일행은 울산건설국장으로부터 현지상황을 들었다.
 한편 이날 식전에서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아데나워 서독 수상,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등 내·외 요인과 이병철 외자도입 미국교섭단장, 이정림 구주(歐洲)교섭단장 등 모두 26명에게 기념품으로 금메달이 증정됐다.>

 기공식이 열렸던 당시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의 자연부락 '납도(納島)'는 작은 섬이었다. 개구리가 움츠려 있는 모양과 흡사해서 개구리섬, 즉 납도(納島)라 했다. 동양나이론(현 효성 울산공장)이 1992년 6월 1일 "민족중흥의 초석이 된 이곳을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길이 보존하고자 기념비를 건립한다"고 새긴 '한국 공업입국 출발지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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