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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초중기부터 서양의 열강들(미국·프랑스·독일·영국·스페인·노르웨이·러시아 등)은 태평양 연안 각처에서 앞다투어 포경을 시작했다.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을 당시 모든 동력은 순전히 고래의 지방에서 체취한 경유(鯨油)를 사용했다. 특히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델몬트는 양초를 만들어서 어두운 밤길을 밝혔다.
 양초를 만들기 이전까지는 런던 거리를 밝힌 것은 카바이트를 이용한 가스등이었다.  양초가 생산 되면서 런던 거리는 더욱 밝아졌고, 이로인해 어두운 밤거리에서의 범죄도 현저히 줄어 들었다.  런던의 이런 현상을 주시하던 프랑스, 독일, 덴마크 등 여러 나라도 양초를 수입해 밤거리에 불을 밝혀 범죄 뿐만이 아니라 도시의 미관도 높이기 시작했다.

 델몬트 회사는 밀려드는 각국의 주문량을 충족 시키려고 24시간 생산성을 높여 나갔다.  하지만 수요에 충족시킬 원료 충당이 시급해지자 급기야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포경선들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 동서해로 몰려와 무주공해인 것처럼 무차별 포경을 감행하며, 한해에 4~5,000두의 대형고래를 포획했다.
 이들 열강들은 서로 경쟁하듯 이동식 운반선과 고래 해체선을 대동하며 포획한 고래는 즉시 선상으로 끌어올려 지방을 분리 해체했다. 경유 채집에 불필요한 살코기는 바다에 버리기도 했다. 당시 철저하게 외국의 문물을 배척하던 대원군은 전국 각처에 척화비를 세우고 수상한 배가 나타나면 즉시 보고 하도록 했고, 때에 따라서는 상륙시 발포하기까지 했다.

 쇄국정치로 인한 문물배척은 우리민족에게 엄청난 수난의 멍애를 짊어지게한 역사의 오욕이기도 하다. 그 당시 대원군에게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서·남해 연안에 이양선 몇척이 내왕했고, 거문도(흑산도) 앞바다에 이양선 수십척이 지나갔다는 보고서들은 모두 서양의 포경선들이었다.
 이렇게 활발한 포경이 지속되고 있던 1880년 후반 러시아는 한반도 연안에서의 원활한 포경과 경유채집을 위해 1889년(고종 광무 3년) 조·러 부경기지(剖鯨基地)를 설립하는 협약을 채결했다. 함경도 청진, 강원도 장전, 경상도 울산 구정포(九井浦 : 장생포)였다.

 대한제국의 대한외교위원 정형택(鄭衡澤)과 러시아 대아백작(大我伯爵) 헨리케셀링이 광무 4월 29일에 조약을 협정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한국 연안의 고래잡이를 주도하며, 일본 포경선과는 빈번한 충돌이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고래잡이 다툼에서 씻을 수 없는 전쟁의 상처를 입었다. 비록 승전한 일본이지만 여순항을 점령하고 사수하려던 양국은 수십만의 전사자를 내었다.  일본은 30만이 전사하고 러시아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여순항의 교두보가 무너지면서 일본은 승리하였고, 러시아는 패전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러시아가 관할했던 대한제국의 모든 제해권은 일본이 차지하게 되면서 한반도 연안 고래기지 세곳도 자연스럽게 일본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반도 연안에서 일본의 독무대 고래잡이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저명한 해양학자 로이 챔프맨 앤드류(Roy chanpman Andrews)가 1912년 울산의 구정포를 찾아 왔을 땐 멸종되어 가던 대형고래, 특히 귀신고래의 종이 사라져 가는 마지막 순간의 전성기 였다. 그동안 마구잡이로 남획한 탓으로 이미 귀신고래, 향고래, 참고래 등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몇 남지 않은 보리고래와 중형에 속하는 밍크고래 종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2차대전이 끝나고 1946년 한국인 자체로 포경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우리 바다에는 귀신고래, 참고래, 향고래, 보리고래 종은 극소수 뿐이었다. '범 없는 산중에 토끼가 왕'이란 말 같이 동서해 바다엔 쓸모없는 돌고래 떼만 수면을 어지럽힐 뿐, 환상적으로 물을 뿜거나, 잠수할 때 마지막 내보이던 나비 날개 짓 같은 꼬리 모습은 영원히 고래의 선사 고향 염포만 울산 앞바다에서는 볼수가 없게 되었다.

 올해는 그동안 16회에 걸쳐 지속해 오던 '고래축제'는 태화강 '물축제'와 통합되면서 명칭도 '2011 울산고래 축제'로 바뀌었다.
 고래의 고향 선사바다에서 고래를 보려고 전국, 아니 해외에서까지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보다 보람차고 수준 높은 볼꺼리를 관계 당국에서는 만들어 주어야 한다.
 고래 기지가 섰던 구정포, 그 자리엔 대한조선공사 대형선박 건조장이 들어섰고 주변 산과 바다는 상전벽해로 변해 추억속에 옛 정만 더하게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옛 구정포의 고래 부경기지(剖鯨基地)를 재현하여 보다 유익한 고래축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앞선다.

※구정포 : 구정포(九井浦)는 항구 입구에서 끝까지 우물이 아홉 개가 있었으므로 구정포란 지명이 생겼고, 일제강점후 장생포란 지명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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