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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은 다양한 능력을 지닌 올곧은 지식인이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저항한 생육신으로서, 일생을 길에서 떠돈 방랑객이란 이미지에 가려 참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백성의 참혹한 삶을 함께 아파한 애민(愛民)시인이었다. 민본정치와 조선 성리학의 큰 흐름을 이룬 사상가이었다. 일본다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다인(茶人)이기도 했다.

 약관의 나이에 방랑길에 나선 김시습은 10년간 전국을 떠돌다가, 서른을 갓 넘겨 경주 금오산(金鰲山)에서 7년간을 칩거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울산의 선비 양희지[(楊熙止), 세종 21년(1439년)-연산군 10년(1504년)]와 김시습이 만나 대화를 나눴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양희지가 문과에 합격하기 3년여 전 성종 2년(1471년)이었다고 한다. 양희지의 행장(行狀)에 두 사람이 만나 대화를 나눈 사실이 나온다.

 <신묘년[성종 2년(1471년)]에 금오산에서 독서를 하다가 김동봉[(金東峯), 김시습]을 만나 한 열흘 함께 지냈다. 동봉은 꼭 매일 명수(明水)를 갖추고 예불을 하고, 예불이 끝나면 시를 짓고, 시를 짓고 나면 다시 곡을 하며 시고(詩稿)를 불태워 버렸다. 공(양희지)이 "명교(名敎)중에도 악지(樂地)가 있거늘 어찌해서 이와 같이 괴로워 하십니까? 이제 바야흐로 주상께서 밝고 훌륭하셔서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시니 열경[(悅卿), 김시습]은 나아가서 벼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니, 동봉(東峯)은 흐느끼며 "그대는 세상에 나가 힘쓰오. 광인이 어찌 벼슬에 맞겠소."라고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금오산 용장사에서 지내는 김시습에게 어느 날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세조 10년(1464년) 경 사신으로 온 '준(俊)'이란 일본 승려가 태풍으로 염포왜관에 발이 묶이자 김시습을 만나러 온 것. 김시습은 차를 대접하면서 다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오랜 친구처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그 만남을 계기로 일본 승려 준은 고국에 돌아갈 때까지 여러 차례 용장사에 왔다. 

금오산 용장사에서 7년 칩거
울산선비 양희지·일본승려 등 만나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창작


 김시습은 '준 장로와 이야기하며(與日東僧俊長老話)'란 시를 썼다. <고향을 멀리 떠나니 뜻이 쓸쓸도 하여/ 옛 부처 산꽃 속에서 고적함을 보내누나./ 쇠 차관에 차를 달여 손님 앞에 내놓고/ 화로에 불을 더해 향을 사르네./ 봄 깊으니 해월(海月)이 쑥대 문에 비치고/ 비 멎은 산 사슴이 약초 싹을 밟는구나./ 선의 경지나 나그네 정 모두 아담하나니,/ 밤새 오순도순 이야기 할만 하여라.>
 

▲ 태화루

 인근 고을을 주유하던 김시습은 울산에도 들러 염포왜관을 찾았다. '섬 오랑캐의 거처'란 뜻의 '도이거(島夷居)'란 시도 지었다. 송수환(宋洙煥)의 '울산의 역사와 문화'에 소개돼 있다.

 

<바닷가에서 살아가려고/ 띠풀집 수십 채가 모였네./ 성품은 조급한데 고깃배는 작고/ 풍속도 다르고 말투도 건방지네./ 하늘 끝에 고향을 두고/ 푸른 바닷가에 자리잡아/ 왕화(王化)에 귀의해서 투항해오니/ 왕께서 불쌍하다며 이쁘다 여기시네.> 두 편의 시는 그의 시집 '유금오록(遊金鰲錄)'에 실려 있다.

 김시습은 세종 17년(1435년) 서울 성균관 북쪽 반궁리에서 태어나, 성종 24년(1493년)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峯),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학문에 정진하고, 기쁨을 찾아야 한다는 그의 삶의 지침은 이름에 드러나 있다. 이름 '시습(時習'과 자 '열경(悅卿)'은 논어(論語)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에서 딴 것.

 '비운의 천재'와 '절의의 상징'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앞의 것은 다섯 살 때 세종 임금 앞에서 시를 지어 온 나라에 이름이 떨쳐 비롯됐다. 오세(五歲)란 별명으로 불렸다. 뒤의 것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서 비롯된 것.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는 방에 틀어박혔다. 사흘만에 뛰쳐나와 울부짖으며 책을 불태우고는 발광하여 똥통에 뛰어들었다. 머리를 깎은 뒤 법명(法名)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전국을 떠도는 주유천하에 나섰다.

 그의 심정이 자문자답 형식의 '동봉유가(東峯六歌)'란 시에 드러나 있다.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 이름 동봉(東峯)/ 헝클어진 백발에 볼품없구나./ 스무 살 되기 전에 문무를 배웠거늘/ 시원찮은 선비 모양 하기 싫어지./ 자고 나니 쌓은 공부 뜬구름 되어/ 물결 가는대로 떠도니 누구와 함께 할꼬>라고 했다.
 세상의 도리가 완전히 뒤집힌 마당에 공부를 한다는 것이 무의미했고, 추악한 세상에 온전한 정신을 갖고 지낸다는 것 또한 무가치한 일이었다. 세종의 뜨거운 격려를 가슴에 품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더욱이 세종의 세손(단종)을 부탁한다는 당부를 저버리고, 수양대군에 빌붙은 권신들과 한양의 하늘 아래 함께 지낸다는 것이 치욕이었다. 정녕 미치지 않고서야 하늘과 땅이 뒤집힌 그 불의한 시절을 어찌 견딜 수 있었으랴.

    그 아무도 손대지 않던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었다.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를 실천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제 한 몸이나 깨끗이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자신에게 묻고 또 물으며 관서지방을 떠돌았다. 마음에 품은 것,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시로 태어났다. '유관서록(遊關西錄)'으로 묶었다. 내쳐 관동지방을 떠돌았다. 역시 많은 시를 썼다. '유관동록(遊關東錄)'으로 엮었다. 호남을 거쳐 잠시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머물며 '유호남록(遊湖南錄)'을 냈다. 그렇게 10년을 전전했다.
 

▲ 태화루

 31세 때인 세조 11년(1465년)에 금오산 용장사(茸長寺)에 거처를 마련했다. 금오산실(金鰲山室)이라 했다. '용장사에 머물며(居茸長寺經室有懷)'란 시에서 감회를 이렇게 읊었다.

 

    <용장산은 깊고 으슥하여/ 사람이 오는 것을 볼 수 없구나./ 가랑비는 시냇가 대숲 사이로 흘러가고/ 살랑대는 바람은 들판 매화가 막아주네./ 작은 창 아래 사슴과 함께 잠들고/ 마른 의자에 앉으니 내 몸이 재와 같구나./ 어느새 처마 아래/ 뜨락의 꽃이 졌다가 또 피네.>

 모처럼 지친 심신에 평온이 찾아왔다. 인적 드문 금오산 계곡, 사슴을 벗 삼은 휴식과 적요한 산사생활, 용장사 거처에서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으리라. 공연히 마음을 심란케 하는 바람을 막아주는 처연하게 핀 들매화도 벗을 삼았다. 추호의 동요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곧은 마음을 분명 매화에 담았으리라. '매월당'이란 또 다른 호가 태어났다.

백성의 아픔 담은 애민시 지어
부조리 고발한 지식인이자 사상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던 진정한 자유인


 금오산에 거처를 정한 3년 뒤 34세에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완성했다. 완본(完本)은 알 수 없으나, 고전소설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취유부벽정기' 5편이 전한다. 남염부주지는 세조의 왕위찬탈과 전제정치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는 일종의 사상소설이다.

 <오두막집에 자리를 까니 두루 따스한데/ 막 떠오른 달빛에 매화 그림자 창에 가득하구나./ 등불 돋우며 밤 늦도록 향을 사루고 앉아서/ 사람들이 못 보던 글 한가롭게 지어내네.// 옥당에서 붓을 휘두르는 데에는 마음 없어진 지 오래고/ 소나무 어리는 창가에 단정히 앉아 있노라니 밤 정히 깊네./ 청동 향로에 향 꽂고 검은 책상 정갈히 하여/ 멋들어지고 기이한 이야기를 찾고 또 찾노라>란 내용의 '금오신화를 짓고(題金鰲新話後)'란 시를 남겼다.

    백성들의 참담한 삶을 살피며 위정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지식인의 본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가난에서 벗어나려 아무리 발버둥쳐도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백성의 모습을 '영산가고( 山家苦)'란 시에서 <농사짓는 사내 땀흘려 한 해 내내 일하고/ 양잠하는 여인 헝클어진 머리로 봄 내내 고생하네./ 취한 사람, 배부른 사람, 잘 차려입은 사람/ 성안 가득 보이는 사람은 모두 편안하건만>이라고 눈물겹게 표현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지려고 이만저만 난리가 아니다. <가죽 벗겨 피 빨고 뼈까지 도려내고도/ 가진 자의 욕심은 하늘을 찔러 그칠 줄을 모르누나./ 앞에 가던 수레 엎어진 일 역사에 실렸건만/ 어인 일로 어리석은 짓 멈추지 않나?/ 그대들은 보지 못하는가/ 집 하나 지으면 열 집이 흩어짐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울며 비틀비틀 쫓겨가는 저 모습을.> 돌베개출판사가 펴낸 '우리 고전 100선'의 '김시습 선집'에 실려 있는 '오호가(嗚呼歌)'란 시의 끝 부분이다. 예나 이제나 가진 자들의 욕심은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있다. 2011년 6월의 이 땅도 그렇다. 저축은행 사태가 증명하고 있다.
 

▲ 염포만


 김시습은 금오산에 머물 때 울산에 들러 태화루에도 올랐다. '태화루'의 풍광을 노래했다. 송수환이 번역한 '태화루 문집'에 <높은 누각에서는 멀리 대마도가 보이고/ 끝이 없는 바다는 밤낮으로 물결치네./ 드넓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데/ 환한 숲에는 마침 귤나무가 우거졌네./ 난간에 기대어 멀리 서쪽 고향 바라보니/ 동녘에서 기둥에 시 쓰며 세월만 보냈구나./ 삼한 땅 두루 다니다 울산까지 왔더니/ 내 마음 아는 이, 한 마리 갈매기 뿐이구나>라고 실려 있다.

 김시습은 지식인의 책무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최선의 정치란 훌륭한 정치를 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최선의 정치는 순리를 따르는 데에서 이뤄진다. 무위(無爲)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진실함을 둔채 쉼 없이 정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안히 실행하는 사람은 성인(聖人)이요, 이로운 방향으로 일을 실행하는 사람은 그 아래요, 억지로 일을 벌이는 사람은 또 그 아래다. 정치를 하겠다면서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백성이 배반한다. 배반했다고 하여 무력으로 그들을 위협하는 것은 참으로 위태로운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 그의 안목이 놀랍다.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내세운 사상가였다. 그의 기일원론은 주기론(主氣論)과 주리론(主理論)으로 대립되는 당대 성리학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평등한 세계관을 구현하려는 선구적인 학설이다. 나중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 이어져 조선 사상사의 큰 흐름을 이뤘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며 시대와 불화하던 그는 59세의 나이에 부여 무량사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세상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했던 김시습. 그가 지은 '고풍(古風)'이란 시가 그의 본래심(本來心)을 드러내고 있다. <마음 바탕 깨끗하기 물과 같고/ 흔연히 트여서 막힘이 없다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모두 잊는 것./ 찻잔 가득 차 따라 마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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