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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운포성에서 내려다본 평화로운 마을 황성이다. 조선시대에는 수군이 주둔한 군사요충지로 활용하다 부산 수영으로 옮겨갔다. 건너편 온산지역으로 가는 나룻배가 있었으나 추억으로 남아있고 마을주민은 다른곳으로 이주하였다. (1989년 황성부락)

 

서울 밝은 달에 밤 이슥히 놀고 다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가
본디 내 것이건만 빼앗긴 걸 어찌하리오.

 
상실을 받아들이고 스산함에 익숙해진 황성동 마을은 아내를 잃고도 노여워하지 않은 처용의 야량과 닮았다. 병풍처럼 들어선 잿빛 공장에 터전을 빼앗긴 어촌마을에서는 과거 비경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름다운 마을 풍광은 떠나간 주민들의 가슴에 새겨졌고 이곳에는 처용암과 개운포만이 남아 천년이 넘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 당산제 지내던 '성흥사'
황성동은 조선 숙종 46년(1720년)에 성외리와 황암외리라 하던 마을이다. 영조 41년(1769년)에는 성외가 황암으로, 정조때는 성외, 황암, 세죽, 장암, 지동으로 갈라져 있다가 순조 때는 지동리가 없어졌다. 고종 31년(1894년)에는 성외, 세죽, 개곡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11년 다시 성외, 천곡, 세죽, 계곡, 황암으로 세분됐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황암의 황자와 성외의 성자를 따서 황성리가 됐다.

 

   
▲ 처용암은 처용설화의 전설이 서려있는 조그만 바위섬으로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앞 해상에 위치하고 있다. 한때 이곳에는 횟집이 성업을 이뤘으나 지금은 공업화에 따른 개발로 마을이 철거되어 쓸쓸한 포구로 변하였다.

 1995년 5월 부곡동, 용연동과 함께 통합돼 개운동이 됐으며, 1997년 울산시의 광역시 승격에 따라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이 되었다.  1998년 10월 행정동인 선암동에 통합됐다.


 황바우·새미골·성외·노름바우끝·상치미 등의 옛마을과 망시등·불산디·동산 등의 야산, 개지랑골·소리골 등의 골짜기, 둥근바우(쿵쿵바우)·사갓돌 등의 큰 바위와 사찰로 성흥사가 있었다.

 새미골마을은 마을에 있는 우물에서 물이 많이 나고 맛도 좋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며, 성흥사는 대보름 전날 당산제를 지내던 곳이다.
 
# 신라 국제무역항 '개운포'
황성동에는 신라시대 알아주던 국제무역항이 있다. 지금은 공장에 둘러싸여 쇠락한 포구, 개운포다.
 개운포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지리지인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 통일신라 때에 경주를 배후에 둔 산업의 중심지로서, 신라 최대의 국제무역항으로 나타난다.
 특히 아랍 상인들이 많이 와서 살던 당나라 양주로 가는 바닷길의 신라 측 출발지였으며 당시 신라와 교역하고 왕래하던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은 물론, 동서교역의 주역인 아랍인들도 이용하던 국제항이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골품에 따라 사용할 수 없는 고급 물품들의 목록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에머랄드, 알로에, 페르시아산 카펫 같은 서역제품이 들어 있다.
 개운포는 외황강의 하구이며, 강과바다가 만나는 포구로 자연입지가 좋아 조선시대에는 군사항, 수군기지로 각광을 받았다. 왜구 침범이 잦아 조선말기 수군 해산 때까지 군인이 주둔했다. 개운포 성터 그 유적. 성터 둘레에는 도랑을 판 흔적이 있다. 해자의 흔적이다. 

 

   
▲ 설화의 발원지인 남구 황성동 처용암에서 시연되고 있는 처용무.


# 천년 전설 깃든 '처용암'
처용이 처음 나타났다는 처용암은 개운포의 전설 같은 흔적이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처용설화를 들여다 보면 신라 49대 헌강왕(재위:875~885)이 동해안의 개운포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잃어버렸다. 이상하게 여긴 왕이 물으니 천문을 맡은 관리가 "이는 동해 용의 짓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한다"고 답했다. 왕은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라고 관리에게 명령하자 곧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이 때문에 이 곳을 '구름이 개인 포구'란 뜻의 개운포(開雲浦)라고 이름 지었다.

 동해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이 탄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행을 노래하면서 춤을 추었다. 용의 아들 하나가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왕을 보좌하였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헌강왕이 그를 붙잡기 위해 미인에게 장가들이고, 6두품 귀족이 오르는 벼슬도 수여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를 탐낸 역신(질병을 옮기는 귀신)이 사람으로 변하여 밤이면 몰래 데리고 잤다. 하루는 처용이 집에 돌아와서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다.

 이때 역신이 처용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당신의 아내를 탐내 범했는데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격하고 아름답게 여깁니다. 앞으로는 당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연은 이런 까닭에 고려시대에도 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문에 그려 붙여서 나쁜 귀신을 쫓고 복을 맞아들인다고 기록했다. 왕이 돌아온 후 영취산 동쪽에 좋은 자리를 잡아 망해사(望海寺) 또는 신방사(新房寺)라 부르는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은 약속대로 용을 위해 지은 것이다.

 처용이 바다에서 올라온 이 바위를 처용암이라 불렀다.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됐다.
 

 

   
▲ 전설의 마을 처용암이 있는 개운포구다. 해질 무렵 고기잡이배는 포구에 정박하고 아낙네는 키를 들고 곡식을 고르는 손질을 하고 있다. (1968년)

# 공단에 밀려난 어촌마을
원래 처용암이 있는 세죽마을은 한적한 어촌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들어선 인근 공업단지가 계속 확장되면서 인적이 끊겼다.

 마을은 석유화학단지로 둘러싸였고 사람들은 보상금을 받아 모두 떠나고 없다.
 그나마 공단이 들어서면서 근로자를 상대로 동해의 온갖 횟감을 팔며 90년대 초까지 번창했던 횟집들도 이제 찾아 볼 수 없다.

 공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약한 악취를 견대다 못해 모두 떠났고, 공장으로 둘러싸인 개운포에 처용암이 포로처럼 갇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빽빽히 우거진 상록수림에서는 과거 생명의 힘이 그대로 전해진다. 글=하주화기자 usjh@  사진=유은경기자 usy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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