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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대 암각화 탁본.

내년 2012년 2월 3일이 울산공단이 태어난지 5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이다. 울산광역시는 '근대화 50년 새로운 도전 100년'이란 슬로건 아래 대대적인 울산공업센터 50주년 기념사업의 준비작업에 나섰다. 지난 7월 14일에는 엠블럼을 만들었다.

울산시가 준비하고 있는 기념사업은 모두 4개 분야 17개 사업. 울산공단 50년 상징물 건립과 제2도약 선언문 작성·설치, 타임캡슐 제작, 울산경제 50년사 발간, 울산경제 50년 특별전, 울산 미래발전방안 국제심포지엄, 조국근대화 투어가 근간을 이룬다. 보여주기식 일회성 가요-쇼 등의 행사보다는 울산의 미래비전을 담은 내실 있는 사업에 치중되기를 기대한다.

울산에 현대식 산업단지가 만들어진 것이 내년이면 반세기가 되지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울산은 이미 산업화의 불씨가 댕겨져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공업센터가 결코 우연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필연성을 갖고 있었다는 증명이 된다고도 하겠다.

산업화의 불씨란 반구대 암각화에서 알 수 있는 배 제조기술과 달천 철광산과 쇠부리터에서 확인되는 철 제련기술, 그리고 인류가 삶을 영위하는 데에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소금을 만드는 대규모 염전을 갖춘 것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그 첫머리를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반구대 암각화가 차지한다. 여러 학자들이 분석한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지금까지 확인된 296점의 그림 가운데 배 그림에서 선박 제조기술을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배 그림은 모두 5점이다. 고래가 가장 많이 새겨진 왼쪽 바위면에 2점이 있다. 또 뭍짐승이 많이 새겨진 가운데 바위면과 오른쪽 바위면, 그리고 가장 오른쪽 상단 바위면에 각각 1점씩이 있다. 물론 그 배는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58점의 고래그림으로 미뤄 볼 때 고래잡이에 이용된 배로 해석되고 있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이들 배 그림에는 적게는 서너명, 많게는 20여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최대 20여명이 타는 통나무배를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반구대 암각화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6000-7000년 전에 그런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놀랍다. 그 때의 간석기도구를 만들고 활용하는 솜씨와 목재가공기술, 배 건조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배 제조에 대한 최초의 유물은 지난 197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부산 동삼동 패총 유적에서 발굴한 '배 모양 토기'이다. 이 토기는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배 그림과 흡사하다고 한다.

이들 사례로 미뤄 반구대 암각화를 만든 울산의 신석기인은 충분히 20명이 탈 수 있는 통나무 배를 만들 수 있는 선진 조선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난 1970년대 초에 세워진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의 시작은 바로 반구대 암각화를 만든 그들 신석기인에서 비롯된 셈이다.

한편 부산 동삼동 패총 유적에서는 사슴 무늬의 토기도 나왔는데, 그 새김기법이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사슴의 새김기법과 아주 흡사하다고 한다. 배와 함께 사슴의 새김기법 또한 흡사함으로서 반구대 암각화 일대에 거주한 울산의 신석기인의 우수성이 다시 한 번 드러난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나타난 울산의 조선기술은 꾸준히 맥을 이었다. 신라 때에는 지금의 중구 반구동 내황부락 일대에 국제무역항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봐서 상당한 조선기술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80여년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남구 황성동에 자리잡아 배도 건조했다. 당시 배를 만들었던 곳을 선소(船所)라 불렀으며, 지금도 선수부락이란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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