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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근처 주차장 담장너머로 보이는 주상복합 건물. 오래된 것과 새 것과의 공존이 울산읍성 둘레길의 멋이다.

#아픈 역사를 가진 성

울산읍성은 아픈 역사를 가진 성이다. 1384년 고려 우왕 때 처음 축성된 것을 100여년이 지나 조선 성종 때(1477) 중축했다. 성은 왜구의 약탈행위에 대비한 방비책이었다. 고려 우왕 때 그 약탈은 극에 달했다. 울산읍성은 둘레 3,639척(약 1.7㎞), 높이 15척(약 7m)에 달하는 제법 규모 큰 성곽이었다. 해자와 4개의 문을 갖춘 위용을 자랑했다. 성곽은 성남동과 옥교, 북정, 교동을 이은 둥근 사각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울산읍성의 생명은 고작 120년이었다. 견고한 성이었지만 왜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은 읍성을 헐어냈다. 민초들의 땀으로 세워진 성벽이 헐리고 그 돌들은 학성으로 다시 세워졌다. 왜란 후에도 성은 돌아오지 못했고 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호란이 닥쳤다. 울산읍성은 흩어져 존재할 뿐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바람이 헐려진 성벽위로 흘렀다. 폐허처럼 변한 성터위로 한여름의 햇살이 넘쳐났고 사람들의 발길이 오랫동안 지났다. 400여년의 시간은 너무 아득해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속절없는 시간 속에서도 그 땅은 개인에게 불하되거나 없어 질 성질이 아니었다. 성의 재건을 위해 남겨놓은 염원과 상징의 땅 이었다.
 그 위로 자연스럽게 길이 났다. 일제 강점기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일부 개인에게 넘어갔지만 골목으로 살아남아 그 명맥을 유지했다.
 
▲ 읍성길에서 가장 좁고 긴 중앙호텔부근 골목길.


#골목으로 살아남은 흔적


읍성을 찾아 가는 날, 직각으로 내려쬐는 햇살이 따가웠다. 읍성은 동헌을 중심으로 4개의 문과 성안에 여덟개의 우물을 가졌다고 했다. 읍성의 중심인 동헌은 조선시대 수령들의 공사의 중심이었다. 현재의 동헌은 숙종 7년(1681)에 울산 부사 김수오가 지었으며 여러번 이름을 바꿔달면서 영조 36년에 홍익대가 다시 건립했다.
 동헌의 규모는 팔작지붕의 정면 6칸, 측면 2칸인 반학헌과 안채인 내아가 남아있다. 현재 울산초등학교 자리 등에 일제 강점기까지 객사와 여러 채의 건물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일대에 일본 신사가 들어서고 시장이 형성되면서 하나 둘씩 헐리고 사라져갔다.
 
▲ 읍성길은 평지로만 연결되지 않는다. 북문터로 추정되는 울산기상대로 연결되는 언덕길.


#서문에서 출발하다

지금은 구시가지라는 이름으로 축소됐지만 한때는 울산읍의 중심이었다. 수백년동안 권세를 누렸던 땅이다. 울산은 울산읍성과 언양읍성을 비롯해 영성, 진성, 왜성 등 많은 성들이 존재했다. 한 고을에 이렇듯 여러 개의 성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 험난한 시간 속에서 굳건히 울산의 중심을 지켰던 곳이다.
 동헌을 나와 양사초등학교를 지나 국민은행에서 목살골목으로 방향을 틀면 그 초입에 울산소바우목살집 앞에 읍성안내도가 나온다. 오늘 읍성길의 시작이다.

 시작부터 좁고 긴 골목이 이어진다. 현대적인 간판들과 휘황찬란한 쇼윈도들로 가득 찬 곳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면 이렇듯 은둔하듯 숨은 길이 열린다.
 길은 가끔 돌아서거나 휘어지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정돈되지 않은, 하지만 아기자기한 골목은 묘한 기분을 건네준다. 듬성듬성 꽃나무들이 꽃불을 피워대는데 그 아래 역시 듬성듬성 빈집들이 있었다. 주인 없는 사이 꽃을 피운 나무들의 여름만 분주하다. 재개발예정지구가 되면서 빈집들이 늘기 시작했다.

#역사 속으로 걷는 한걸음

성은 평지로만 연결되지 않는다. 걷다보면 언덕이 이어진다. 기상대 앞길이다. 이곳이 북문터가 된다. 현재 교동과 북정동의 경계로 울산읍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해남사 앞을 지난다. 정갈한 절집 마당에 연꽃이 피었다.
 길을 따라 군데군데 성벽의 일부임을 짐작할 수 있는 석축들도 보인다.
 성마을 2길을 따라 내려가면 장춘로를 만난다. 읍성길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대로다. 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동헌 앞을 지난다. 현재 88곰장어 앞 사거리에 동문이 있었다.

 예전 일본풍 건축물의 단면을 보여주던 옥교동사무소가 헐리고 새 건물이 중앙동주민센터 이름을 달고 새로 섰다. 아픈 역사도 품어야 할 것들은 있을 것인데 무엇이 보존되고, 무엇을 없애야 하는지는 아직도 명확한 기준이 없다.
 주민센터를 지나 중앙호텔 쪽으로 난 폭 1m 남짓한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학성로로 이어진다. 이 골목이 읍성길이 만든 길 중 가장 길고 좁은 길이다. 두 사람이 마주 비켜가기 조차 힘들다. 그 한쪽에서 대낮인데도 흥겨운 캬바레 음악이 흘러나온다. 미나리캬바레의 리듬을 뒤로하고 어둑한 골목을 벗어나면 별안간 휘황찬란한 거리의 물결이 쏟아져 들어온다. 길의 표정이 확연히 다르다. 남루하고 궁핍한 골목이었다가 활력 넘치는 상가로 일순 변모한다.

 읍성길은 대로를 끼고 시장을 건너간다. 중앙시장 먹자골목이 아케이드 밑으로 길게 연결된다. 일렬로 늘어선 좌판에 꼬치부터 어묵, 호떡, 튀김 등의 간편한 먹거리들이 가득하다.
 먹자골목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우리은행 뒷골목이 열린다. 골목 한편에 파란풍차 제과점 조리실이 보인다. 그 골목 끝 시계탑 사거리가 남문자리다.
 남문이 있던 자리는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계탑사거리로 더 알려졌다.
 남문에서 옛 주리원백화점 뒤 보세골목을 지나면 길은 학성로와 연결되고 국민은행 성남동지점이다. 여기서 장춘로가 만나는 빅세일마트앞이 서문 터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1.7㎞ 여정이 한 시간 남짓으로 끝이 났다.
 
#복원을 기대하다

울산은 역사 속의 도시다. 그러나 과거를 잊고 선 시간들이 더 많다. 그 잊혀진 시간들을 되돌리려는 노력이 일고 있다. 중구청은 최근 울산읍성 4대문과 옛길을 복원키로 했다. 성문과 성곽 복원으로 1,300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장춘로 북쪽으로 계획된 재개발 사업과 더불어 성곽과 객사 등을 복원하고 남문을 제외한 3대문 건립도 연차적으로 추진 할 예정이다.
 울산읍성의 복원은 버려지거나 외면했던 골목길에 대한 재인식이다. 그것은 울산 역사에 대한 다시보기고 사라진 읍성에 대한 현재적 보살핌이다. 시간을 느리게 휘감아 오래 지탱해온 길. 시간의 깊이를 느끼며 걷는 발자국마다, 우리문화역사가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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