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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동은 1990년대 중반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울산의 새로운 주택지로 등장하게 됐다.
 

1970년대 시외버스터미널 유치로 울산 관문 자리매김
유동인구 증가로 예식장등 하나둘씩 생겨 상권 활성화
선경직물 자리에 선경아파트 건설 신흥 주거지 급부상

우정동은 신흥 주거지로 변화하고 있는 마을이다. 구시가지의 타운으로 연결돼 있는 우정동은 1990년대 중반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울산의 새로운 주택지로 등장하게 됐다. 기존에 형성된 주택가가 밀집돼 있고, 명륜로 북쪽 일대에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아 상주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지역이다. 우정동 주거지에서 상업지로, 상업지에서 다시 주거지로 바뀐 곳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상업지구의 특성이 강한 곳이었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주거지역으로 전화되고 있다. 시외버스터미널이 남구로 이전되면서 유동인구 감소에 따라 상권이 침체한 것이 우정동을 신흥 주택지로 탈바꿈시킨 주요한 요인이었다.

 

#소바우와 정자가 자리한 마을

우정동은 우암동 강정동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다. 소의 머리와 같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우암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졌고, 강정동이란 지명은 강정이란 정자가 세워지면 붙여진 것이다.

우정동은 예종 1년(1949)에 강장리로 불리다가 숙종 34년(1708)에 우암리와 강정리, 장생동리로 갈라져 있었다. 영조 41년(1765)에는 우암리·강정리·장생리로, 순조 10년(1810)에는 우암리·강정리, 헌종 15년(1849)금암리·우암리·강정리·창성리로 각각 나누어져 있었다. 고종 31년에는 창성동·우암동·강정동이란 마을이름을 얻게 됐다.

이후, 1914년에 창성동·우암동·강정동 등의 3개 동과 상안동의 일부를 합해 우정동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됐다.
 


#강장리·장승골·까치골

우정동 옛지명으로는 강장리·장승골·소바우·강정·까치골·불선바우·무지골 등이 있다.
 
강장리라는 지명은 큰 강가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예종 1년에 편찬된 '경상도 속찬지리지'에 따르면, 면제가 시행되기 전까지 강장리에서 태화진을 관할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강장리는 강정리로 불려졌다.

장승골은 이정표인 장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숙종 34년(1708)의 기록에는 장생동리라 하던 마을인데, 현재 선경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서쪽 일대를 가리킨다. 정조년간의 기록에 의하면, 장승골은 창성리라고도 했다. 고종 이후부터는 줄곧 창성으로 불려졌다. 청성리와 창성은 모두 장승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우정동은 또 다른 이름으로 소바우라고 불리기도 했다. 숙종 34년(1708)에는 우암리라고도 불렸는 데, 소를 닮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얻게 된 지명으로 '소바우'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헌종 15년(1849)에는 마을을 가르면서 쇠바우와 우암이라는 지명을 붙였는데, 모두 소바우에서 유래된 것이다.

까치골은 현재 선경아파트가 위치해 있는 서북쪽 일대를 가리킨다. 까치골에는 풍년 도가리가 있었다. '도가리'는 논의 한 구역, 노배미를 뜻한다.
 

 
#번성했던 상권은 사라지고

   
▲ 1970년대 울산시외버스터미널이 자리하면서 급속히 유동인구 늘어 구시가지 상권의 한 축으로 성장한 우정동. 그후 삼산으로 터미널이 이전하고 그자리에 대형 슈퍼마켓이 자리했다. 사진의 가운데 건물이 시외버스터미널.


우정동은 울산이 공업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한 1960년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지와 주택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지금은 명륜로 북쪽 편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이 일대는 고구마나 참외를 재배하던 밭농사 지대였다. 또 상주인구의 대부분이 우정동이나 삼산지구 일대에 농지를 갖고 있었던 농업인이었고, 관공서 및 교육기관 공무원도 높은 거주 분포를 보인 곳이었다.

우정동이 주거지역에서 상업지역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옥교동과 성남동을 중심으로 구시가지 상권이 팽창되면서 우정동 일대까지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해 구시가지 상권의 주변 기능을 맡게 됐다.

이때 우정동은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시작되면서 농지가 주택지로 바뀌고, 상주인구 역시 변화를 보여 농업인이 줄어든 반면 중공업과 화학공단의 근로자들이 증가하게 됐다.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면서 구시가지가 울산의 중심동으로 등장하게 되자, 구시가지 북쪽 끝에 위치한 우정동 역시 상업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로 접어들자 우정동은 독자적인 상업기능을 갖게 됐다. 1970년대 초반 시외버스터미널이 유치되면서 울산의 새로운 관문으로 등장하게 된 우정동은 유동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이에 따른 상업활동도 활발히 이뤄졌다. 구시가지 상권의 주변 기능에 벗어나 독자적인 상업활동도 활발히 이뤄졌다. 구시가지 상권의 주변 기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상업의 틀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우정시장을 비롯해 예식장이 들어서고, 숙박업소와 각종 상가 및 위락시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6년 우정시장이 개장되면서 우정동은 상업동의 틀을 갖추게 됐다.

1970년대부터 독자적인 상업활동을 벌이게 된 우정동은 1980년대에 절정기를 누렸다. 상업지로서 틀이 갖춰지고, 유동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옥교·성남·우정동으로 이어지는 구시가지 타운을 형성시켜 우정동의 전성기를 맞게 했다.

대중교통의 활용률이 높았던 1980년대에 시외버스터미널의 이용 고객이 크게 늘자 일대 상가들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우정시장과 예식장가 역시 만원을 이루었다. 터미널을 중심으로 우정동의 상권 확대가 최고에 달한 때가 이 시기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시외버스터미널이 신시가지로 이전되면서 우정동은 침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유동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상권의 기능이 마비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상업지로 특별한 테마를 찾지 못한 우정동은 1990년대 중반부터 다시 주거지역으로 전환을 거듭한 것이다.


#민간신앙의 명맥 성황당

이 마을에는 토속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있는 데, 우정동 성황당이 바로 그 곳이다. 성황당은 지역의 수호신을 모셔 놓은 집이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 중구 우정동 성황당.
우정동 성황당에는 옛날 울산의 수호신을 모셔 놓은 당집과 신이 깃들여 있다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좁은 터에 자리잡은 낡은 당집과 바로 곁에 서 있는 고목은 도시 한 가운데에서도 예전의 주술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한다. 특히 성황당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이 수백년이 넘는 유서 깊은 나무다.

이 성황당에는 신라 때 울산도호부의 수호신인 계변천신이 모셔져 있다. 계변천신은 계변성의 신두산(지금의 학성공원)에 학을 타고 내려와 고을 사람들의 수록을 관장한 천신을 말한다. 조선시대까지 이 성황당은 울산읍성 안에 있었는데 우정동으로 위치가 옮겨진 것은 정조 10년(1780)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성황당은 우정동 199-2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데, 이전에 185번지에 있었던 것이 1930년대 큰 불로 소실돼 1950년대에 새로 이전한 것이다. 현재 우정동 120여 명의 주민들은 사라져가는 옛 것을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성황당 보존위원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정월 대보름날 당제를 지내고 있다.
 


#효자 송도 선생 정려비

우정동에는 효행의 감동적인 사연을 담고 있는 비각 하나가 전해져 내려와, 부모에 대한 공경심이 점점 퇴색하고 있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부모사랑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우정동 113번지에 '효자 송도 선생 정려비'가 바로 그것으로, 정각과 비석으로 세워져 부모에 대한 송도 선생의 지극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송도 선생의 효행에 관한 기록은 '울산읍지'를 비롯해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 등에 나타나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송도 선생은 연안군 송광언의 후손으로 조선 세종 전후 때 인물이다. 송도 선생은 평소 학업에 힘을 쏟고 부모 섬기기를 극진하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 번은 선생이 사마 시험에 합격했을 때의 일이다. 그 동안 눈병으로 앞을 볼 수 없었던 어머니가 선생의 합격 소식을 전해 듣자, 놀랍고 기쁜 나머지 벌떡 일어나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이 일화는 부모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위해 매진한 송도 선생의 효심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선생은 또 몸을 아끼지 않고 부모를 받들어 자자한 칭송을 받았다.

선생의 이 같은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세종때 효문동에 정려각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후손들이 효문단을 만들어 교훈으로 삼았다. 뒤에 효문단을 신정동 은월봉 기슭으로 옮겨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오고 있고, 비와 정각은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다. 최창환기자 cchoi@

   
▲ 20여년동안 폴리에스테르 직물생산업체로 설립된 선경직물이 1992년 폐쇄되고 그자리에 들어선 선경아파트. 이로인해 우정동 일대는 신흥주거지로 급부상한게된다. 사진은 1972년 무렵의 선경직물(왼쪽)과 그자리에 들어선 선경아파트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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