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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기행문학 대가답게 생생히 묘사한 반구대 풍광
[울산땅 옛글 향기] 13.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2011년 09월 06일 (화) 21:17:49 김종경 kimj@ulsanpress.net
   
▲ 이만부는 국토산하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조선 최고의 기행문집을 펴낸 기행문학의 거인이었다. 반구대를 둘러보고 '반구대 유람(遊盤龜)'이란 시 5수도 남겼다

  15세때 남인 명문가 아버지의 귀향 영향
  벼슬 뜻 버리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
  주역·도학 등 다방면 능통 140여권 저술
  전국 돌며 우리나라 첫 기행문 '지행록' 남겨

부끄러움이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없어도 또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있다./ 때문에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부끄러움이 있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그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하게 된다./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부끄러움이 없게 되려고 생각하게 되고,/ 부끄러움이 없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부끄러움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이것을 일러 부끄러움을 닦는다고 한다./ 요컨대 이를 닦아서 힘써 실행할 뿐이다.

<(有恥可恥/ 無恥亦可恥/ 有恥者必無恥/ 無恥者必有恥/ 故恥無恥則能有恥/ 恥有恥則能無恥/ 恥有恥者以恥爲恥也/ 恥無恥者以無恥爲恥也/ 以恥爲恥故思無恥/ 以無恥爲恥故思有恥/ 恥無恥而能有恥/ 恥有恥而能無恥/ 則是謂脩恥/ 要脩之力行而已)>
 이만부(李萬敷)의 '부끄러움을 닦는 법[脩恥贈學者]'이란 글이다. 98자로 되어 있는 원문 가운데 부끄러울 '치(恥)' 자가 무려 35차례나 나온다. 이만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기를 희망했던 모양이다. 부끄러워해야 능히 부끄러움이 없어진다는, 그래서 부끄러움을 닦을 수 있다는 결론에 공감하게 되고, 나아가 태초의 순수한 동심에 귀의케 만든다.

#  남인 사림의 거두로 올곧한 삶 살아
그는 지금껏 문사로만 알려져 왔다. 참모습은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는 남인 사림의 거두로 대학자이자, 시와 서화, 거문고에 능한 예술가로, 교육자로, 역사가로서의 삶을 살다 갔다. 누구보다도 국토산하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조선 최고의 기행문집을 펴낸 기행문학의 거인이었다. 평생 부끄러움이 없었던 삶은 혼탁한 오늘의 세상에 큰 경책이 되고 있다.

    <伐以增矜 悶以益恥 (뽐냄은 교만을 늘리고 번민은 부끄러움을 더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으면 뽐내게 마련이다. 명예와 재물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래서는 명예나 재물을 얻을 수가 없다. 교만한 마음만 키울 뿐이다. 반면에 어려운 처지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지만, 매사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교만하거나 비관하는 마음을 단속함이 마땅한 일이다.

 <太陽中天 而片雲過之(태양은 저 높은 하늘에 있고 조각구름은 그저 지나갈 뿐이다)>. 구름이 지나가는 순간에 보이는 것은 구름 뿐이다. 구름은 태양을 손상시킬 수도 없으며 잠깐이면 흩어져서 남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구름만을 좇지 말고, 그 뒤에 영원히 빛나는 태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옳지 않은 이단의 학설이 한때 유행하더라도 결코 진리를 손상시킬 수 없음을 태양 아래에 지나가는 구름에 비유했다. 어찌 이단의 학설만 그럴까. 다른 것도 같다.

   
▲ 이만부는 동축사와 운흥사 등도 찾아 시를 남겼다. 사진은 동축사.(왼쪽부터)
   
▲ 이만부는 동축사와 운흥사 등도 찾아 시를 남겼다. 사진은 운흥사 터.

 

 

 

 

 

 

 

# 울산·언양의 명승지를 찾아 글로 남겨
이만부는 10대 중반에 아버지가 귀양을 가게 되자, 따라가 그곳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는 한편 명산대천을 유람했다. 그렇게 시작한 산천 유람은 말년까지 이어졌다. 34세 때 경북 상주에 옮겨와 살면서는 영남 일대를 유람하곤 했다. 울산과 언양에도 들렀다. 반구대(盤龜臺)를 찾았다. '반구대기(盤龜臺記)'를 남겼다. 울산대학교 성범중 교수가 지은 '울산지역의 풍광과 풍류'에 실려 있다.

 <반구대는 서라벌 남쪽 60리에 있다. 운문산이 동쪽으로 나오다가 남쪽으로 돌아 학성과 헌양의 경계를 이룬다. 그 북쪽을 일컬어 치술령이라고 하는데, 다시 우뚝하게 솟은 것이 연화산이고, 치술령에서 나눠져서 높고 영롱한 것이 부용강(芙蓉岡)이다. 조금 평탄하다가 다시 솟아서 쌓인 돌이 버티고 서서 만 길이나 우뚝 선 것이 천마봉이다. 곧장 남쪽으로 이어져서 위쪽이 평평하고 아래쪽은 깎아지른 것이 병풍바위이고, 연화산에서 동쪽에 우뚝하게 솟은 것이 뾰족바위이다. 산과 물이 서북쪽에서 갈라져서 양쪽으로 골짜기가 두르고 동남쪽으로는 야트막한 병풍바위가 두르고 있으니 뒤에는 여덟 굽이가 있고 앞에는 아홉 굽이가 있으며 그래서 뾰족바위가 얽히고 맺혀 있게 되니, 이것이 반구대 골짜기가 이뤄지게 된 유래다. 중략(中略) 물가에는 독특한 바위 셋이 있다. 왕도(王到)와 망선대(望仙臺), 관어대(觀魚臺)라고 한다. 돌에 새겨진 병풍바위 아래에 채운벽(彩雲壁)과 옥천선동(玉泉仙洞)이란 바위가 있다. 그 아래쪽은 완화계(浣花溪)라고 하며, 또 학 그림이 있다. 바위 아래에는 두 개의 거북바위가 있고, 그 위에 반구대가 있다. 병풍 바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포은(圃隱) 선생의 사당이 있는데, 그 위를 포은대(圃隱臺)라고 부른다. 후략(後略)>

 또 동축사와 운흥사 등지도 찾아 시를 남겼다. 송수환이 지은 한시선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에 실린 '태화강(太和江)' 시를 보자. <들판은 강에 닿았고/ 산 언덕엔 옛 고을이 깃들었네./ 말에서 내려 나룻배 타고서/ 삿대 저어 중류로 내려가니/ 흰 새, 검은 새 날아올라/ 울산 내려온 나를 맞이하는 듯./ 홀연히 구름 일어 자리를 가리고/ 바람도 불어와 배와 함께 흘러가네./ 섬 밖은 어디인가/ 수평선 저 너머로 나가면/ 너무도 쉽게/ 멋있는 뱃놀이를 즐길 수 있겠구나.>

# 학자·교육자·예술가
이만부는 조선 현종 5년(1664년)에 서울에서 이조참판과 경기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이옥(李沃)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영조 8년(1732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어머니는 실학자 이수광(李光)의 증손녀. 자는 중서(仲舒). 호 식산(息山). 본관 연안(延安). 그의 집안은 남인의 명문이었다. 그가 15세 때에 노론에 밀려 아버지가 평북 선천으로 귀양을 가자 그도 따라가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런 영향으로 벼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때 서북지방을 모두 답사했다.

 25세에 아버지에게 과거를 포기하겠다는 글을 올려 허락을 받은 뒤부터는 학문 연마에 힘썼다. 영남 유람길에 나서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과 유성룡의 사당 등지를 찾았다. '이기심성학'과 '예학'을 바탕으로 한 '도학'을 주로 하는 퇴계학통을 선호하게 됐다. 34세에 경북 상주 노곡의 식산(息山) 아래에 터를 잡아 이주했다. '식산'이란 호는 바로 터 잡은 산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네 가지를 쉬고자 했다. 사고하는 것을 쉬고, 몸을 쉬고, 말하는 것을 쉬고, 교유하는 것을 쉰다는 것. 은둔하여 학문 천착에만 힘쓰려는 의지를 알 수 있다. 그의 다짐을 엿볼 수 있는 시를 보자. <식산은 이름 그대로 저절로 쉬니/ 멀리 들판의 경치와는 구분되네./ 형체는 고요한 뒤에라야 무성해지니/ 나는 일상을 편안히 지내려 할 뿐이네.>

 1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울로 올라 가 3년상을 지냈다. 36세에 상주로 돌아와 천운재(天雲齋)를 지어 학문 연마에 힘쓰는 한편 제자를 길렀다. 45세에 도학의 전 과정을 서술한 회심의 문제작 '도동록(道東錄)'을 지었다. 내용의 일부 견해 차이로 영남 사림과 갈라지기 시작했다. 문경에 2년간 지내다가 49세에 다시 상주로 돌아왔다. 명산대천을 찾는 유람길에도 올랐다가, '주역(周易)' 탐구에 몰두하여 '역통대상편람(易統大像便覽)'을 지었다. 58세에 거처를 금릉에 옮기고 학문 천착에 골몰했다. '도동록'을 지은 이후 영남선비들과 틈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걱정이 심했다. 다음해 상주로 돌아와 시습재(時習齋)와 승실(升室)을 지었다.

 66세인 영조 4년(1728년) 3월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병든 몸을 이끌고 동생과 아들에게 의병창의에 나섰다. 생애 마지막 작업으로 66세부터 69세 초가을 별세하기 직전까지 후진들의 학습에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해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 발간사업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해 겨울 영조 8년(1732년) 12월 18일 식산정사 시습재에서 숨졌다. 문경 근암서원(近巖書院)에 배향됐다. 그가 지은 상주 외답동의 천운정사(天雲精舍)는 경북도 민속자료 제76호.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임종시(臨終詩) 남겨
죽을 날을 알았던 모양이다. 친구와 제자들에게 임종시(臨終詩)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임종시라고 말한다. <저 달이 늘 와서 나의 창을 지켜주니/ 밝은 빛을 비출 때는 등불을 껐습니다./ 행여 달이 여러분의 책상을 비추거든/ 내 마음 달빛인 줄을 알아 반겨주세요.>
 다방면에 걸쳐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식산문집(息山文集)' 38권과 '도동편(道東編)' 20권, '역통(易統)' 8권, '사서강목(四書講目)' 7권, '지서(志書)' 15권, '태학성전(太學成典)' 13권, '독서법(讀書法)' 2권 등 모두 140여권에 이른다. 그가 남긴 시는 700여수에 이른다.

 

   
▲ 태화강의 현재모습.

 

# 백두산에서 남해까지 전국 돌며 민족애 키워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부터 만년인 64세 무렵까지 국토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전국의 산천을 즐겨 찾았다. 백두에서 남해까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민족애의 절절한 발현이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지세와 지맥과 풍광과 풍속 등을 꼼꼼히 기록했고, 때문에 지리지적 성격의 본격 기행문과 시를 지을 수가 있었다. 국토의 아름다움을 유려한 필치와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으로 묘사했다. 4권 11록(錄)과 부록으로 구성된 '지행록(地行錄)'이란 산수유기(山水遊記)가 태어났다.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 기행문으로서 최고의 산수유람기란 평가를 받는다.

 금강산을 '금강산기(金剛山記)'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금강산은 어떤 비유로도 다 묘사할 수 없는 산이다. 차라리 내 몸에 금강산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만 못하다. 그 산의 편안하고 중후함을 취하여 인(仁)의 표본을 삼고, 그 유장하고 통달함을 취하여 지(知)의 표본을 삼고, 그 험준하고 단절됨이 명쾌하고 시원한 점을 취하여 의(義)의 표본을 삼고, 그 존엄하고도 태연함을 취하여 덕(德)의 표본으로 삼고, 그 어떤 사물 그 어떤 정경도 없는 곳이 없음을 취하여 도(道)의 표본을 삼고, 그 빛나고 찬란함을 취하여 문장(文章)의 표본으로 삼는다면 비로소 금강산을 대하는 도리를 얻게 될 것이다.>

 금강산의 봉우리를 묘사한 대목은 압권이다. 봉우리를 <앞선 것, 뒤선 것, 나아가는 것, 물러서는 것, 정직한 것, 삐뚤어진 것, 교묘한 것, 중후한 것, 쪼그리고 앉은 것, 우뚝 선 것, 존엄한 것, 밝게 빛나는 것, 빼어나고 유순한 것, 곱고 아름다운 것, 얌전하고 아담한 것, 훌륭하고 온화한 것, 수양하여 사물에 오만한 것, 뛰어 솟아 마치 걷는 듯하는 것, 분신하여 마치 나는 것 같은 것, 총총걸음을 떼놓듯 하는 것, 사납게 흘기며 마치 겁주는 듯 하는 것, 마치 고생에
 근심한 듯 하는 것, 강개하여 탄식하는 듯한 것>이라고 했다. 똑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듯이 산 또한 마찬가지. 산을 사람의 심성에 연결시켜서 미감을 살리고 있다.

 앞에서 밝힌대로 울산에도 다녀갔다. 반구대를 둘러보고 '반구대 유람[遊盤龜]'이란 시 5수(首)도 남겼다. 한시선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에 실려 있다. 첫 수는 이렇다. <일찍이 반구대 경승을 들었더니/ 오늘 처음으로 그 골짜기 들어섰네./ 높은 산은 나를 반기는데/ 골짜기엔 거세게 흐르는 물줄기./ 문득 보이는 치솟은 기둥은/ 머리 들어도 다 못 보겠고/ 층대 바위에는 나뭇가지 서로 얽혀/ 여기가 속세가 아님을 알려주네.> '운흥사를 찾아[轉訪雲興寺]'란 시 두 수를 썼다. 둘째 수는 이렇다. <원적산 사이에 솟은 고개/ 운흥사는 그 동쪽에 있구나./ 무지개는 시냇물 위에 걸렸고/ 조릿대 나무는 절간을 둘러쌌는데/ 수레 곁에는 아지랑이 피어나고/ 소매 속에는 바람결 흩날리네./ 고요한 밤 편안히 쉬었더니/ 달빛 아래에서 스님 기척 다가오네.>

 평생을 학문을 천착하고, 시·서·화(詩書畵)에 일관하며 강직한 처사(處士)의 삶을 살다간 이만부. 울산과 귀한 인연을 맺고 울산의 풍광을 그린 많은 글을 남겼기에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참다운 모습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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