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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과 함께 전국이 축제의 계절을 알리고 있다. 울산도 곧 처용문화제가 열린다. 공업축제로 시작한 처용문화제는 울산을 대표하는 시민축제다. 1967년부터 시작한 축제가 벌써 45해를 맞았으니 시간적 내공도 점차 쌓아가고 있다. 공업축제가 처용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공업'이 갖는 딱딱함을 '처용'의 문화코드로 덮을 수 있다는 발상이 첫째였다. 물론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처용의 유명세에 얹혀가려는 상업적 코드도 어느 정도는 가미된 것이지만 어쨌거나 처용문화제는 울산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시대적 분위기와 결합된 이름이었다.
 바로 그 처용문화제가 올해부터 새로운 모습으로 시민들과 만난다고 한다. 대표적인 변화는 거리에서 펼쳐지던 퍼레이드를 없애고 복합 장르공연을 통해 처용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대중화를 추진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45년의 역사성이 갖는 대표적인 콘텐츠다. 장미축제에는 장미가 흐드러지고 맥주축제는 맥주의 노린내가 진동한다. 일본의 대표축제라는 마쯔리만 해도 전국적으로 열리지만 지역마다 차별화된 콘텐츠가 있다. 처용과 유래가 닮은 교토의 기온 마쯔리는 역신과 재앙을 막으려는 대형 가마를 지역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끌어가는 장관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야마보코 순행이라는 이름의 이 축제행렬은 이미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자리 잡아 전세계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역신을 즐겁게 만들어 횡액을 예방하는 상징물이나 맥주, 삼바, 토마토로 대별되는 세계적인 축제가 시작부터 유명세를 탄 것은 아니다. 지역 축제가 전국화되고 세계화되는 것은 지역민들의 꾸준한 노력과 지역의 특화된 가치를 버리지 않는 애정에서 출발한다. 지역의 특산품을 오늘의 문화코드에 연결한 음식축제가 그렇고 놀이나 제례를 현재적 가치의 즐거움으로 변용한 전통축제가 그렇다. 놀랍게도 세계의 모든 축제는 삶의 비극에 기초한다. 질곡된 삶의 현장 속에서 벗어나 일탈된 공간으로 온몸을 던져보려는 욕구가 바로 축제다. 그 기본에 충실하면 사람이 모이고 흥행이 보장된다.
 처용의 코드를 축제와 접목하려는 발상은 울산의 정체성과 맞아 떨어진다. 문제는 45년을 이어 온 축제가 해마다 정체성 논란에 휩싸이는 현실이다. 개막식조차 참여인원의 부족으로 작은 공간에서 해야 하는 것이 처용문화제의 현주소다. 형편이 이런데도 축제를 준비하는 쪽은 무늬만 시민이 주체가 된 채 내용은 여전히 관주도인 행사의 관행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월드뮤직에다 복합장르를 입혔으니 새로운 시도가 아니냐는 호평도 있을 수 있다. 세계의 대중음악을 처용의 문화코드에 걸친 것은 잘한 일이다. 인형극에 판소리까지 복합장르로 처용의 형태를 다양화한 것도 좋은 시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처용문화제라는 거대한 몸통에 걸쳐진 천조각의 하나에 불과하다.

 문제는 몸통이다. 처용을 걸고 축제를 하는데 처용이 몸통이 되어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처용이 몸통이 되고 그 몸통이 참여자와 하나가 될 때 축제는 성공한다. 허구한 날 처용을 의미화하고 도구화하고 상징화하는 일에 매몰되면 학술제나 처용무 공연, 처용암에서 절하는 따위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45년 동안 계속된 축제가 시민과 하나되지 못한 것은 바로 처용의 몸통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용이 가진 놀라운 대중성을 축제의 콘텐츠로 변용시키지 못하고 넥타이 매고 두루마기 걸친 채 술잔을 따르고 논문을 읽는 일로 허송세월을 한 탓이다.
 처용의 코드는 치유다. 왕실과 친한 처용이 서라벌 홍등가에서 질펀하게 취한 채 휘청거리며 돌아간 제집 안방에서 만난 것은 바람난 아내가 아니라 그 아내의 이불 속을 파고든 악성종균이었다. 한마을을 돌면 절반은 목숨이 달아나는 천연두이거나 밤을 도와 노략질로 분탕질하는 바다 건너온 왜구일 수도 있다. 역병이든 도적이든 나약한 민중에겐 종말의 저승사자와 같다. 그 무시무시한 상대 앞에 일그러진 일상은 홍등가의 질펀한 분 냄새나 거나한 술기운도 금방 달아나게 만든다. 아뿔싸, 주인 없는 동안 역신이 마을을 장악해 버렸다. 바로 그 먹먹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처용의 춤, 처용의 노래다.

 신라문화는 바로 수용의 코드를 갖고 있다. 외부의 것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힘이 신라문화다. 신라가 통일의 위업을 이룬 것은 바로 이 수용의 힘이다. 북방의 기마문화로부터 남방의 해양문화, 멀리 로마를 비롯한 서역 문화까지도 받아들인 신라 문화는 그래서 끈끈하고 질긴 생명력을 가졌다. 이런 바탕에서 탄생한 처용이 오늘의 울산에서 새로운 다문화코드로 거듭나는 것은 절묘한 타이밍이다. 몇 해 전 시작한 월드뮤직페스티벌과 가면퍼레이드는 그래서 소름이 돋았다. 처용의 탈바가지를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덮어쓰고 남산로와 돋질로, 번영로를 활보하는 축제를 꿈꾸는 듯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나아가기는커녕 축소되고 폐지되는 게 오늘이다. 축제는 놀이다. 놀이는 활동 자체가 즐거움과 만족을 주어야 한다. 흐드러지게 한판 놀아 여름내 창궐했던 온갖 역신 무리로부터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휘몰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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