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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한 고을의 위상과 품격은 서원을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됐다. 경제적으로는 아무리 잘 사는 고을이라고 하더라도 서원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사족(士族)들로서는 다른 고을 선비들과의 교류에서 뒤지게 마련이었다. 경쟁적으로 서원건립에 나섰는가 하면, 서원이 지어진 뒤에는 사액(賜額)을 받는 데에 온힘을 쏟았다.

 문풍(文風)이 취약한 울산이 서원 건립에 매달린 과정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눈물겹다. 흔히 송정박씨(松亭朴氏)라 불리는 북구 송정동과 울주군 범서읍 구영리 등지에 거주하는 밀양박씨가 경북 영천에서 울산에 옮겨온 것도 울산의 서원건립이라는 목표와 박씨 집안의 사정이 맞아 떨어져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울산은 밀양박씨 울산 입향조인 괴천(槐泉) 박창우(朴昌宇)의 선비로서의 역량에 큰 기대를 걸었다.


 조선 현종 초 경북 영천에 살고 있던 밀양박씨 밀직부원군파의 후손 박창우는 울산 사족(士族)들의 환대를 받으며 농소에 옮겨왔다. 그 뒤 박창우의 후손들이 인근 송정마을에 살게 되면서 마을 이름을 따서 밀양박씨 송정파(松亭派), 또는 송정박씨로 불렸다. 박창우가 가족을 데리고 울산에 오게 된 사정은 그의 '괴천문집(槐泉文集)'의 남이록(南移錄)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울산 이주는 쉽게 이뤄졌다. 울산의 사족들로서는 지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도 시급히 서원을 건립해야 했고, 그래서 역량을 갖춘 선비가 필요했다. 영천과 안동으로 이어지는 퇴계학맥에 닿는 박창우가 최적의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때 마침 박창우는 영천을 떠나기로 결심한 터였다. 박창우로서는 경제적인 어려움에다 두 아들의 처향이 울산인 점도 울산 이주를 결심한 배경이었다.


 울산에 이주한 뒤 박창우와 두 아들은 울산 사림에서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서원 건립과정에 힘을 보탰음은 물론 사액과정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울산 사림은 효종 10년(1659년)에 서원건립을 발의하여 숙종 4년(1678년)에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준공하고, 이듬해 포은 정몽주와 회재 이언적을 모셨다. 이어 사액 청원에 나섰다. 학성이씨와 김해김씨, 김해배씨, 광주안씨 등 울산의 기존 사족과 함께 박창우와 두 아들 세현과 세도가 주도했다. 박창우의 차남 세도는 수년간 한양에 머물면서 사액에 크게 기여했다. 세 차례의 실패 끝에 숙종 20년(1694년)에 사액됐다.


 박창우는 울산에 이주한 두 해 뒤 현종 7년(1666년)에 이동영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 뒤 차남 세도 역시 생원시에 합격했다. 서원건립과 사액에 힘을 보태는 한편 경제적으로도 점차 안정되면서 밀양박씨 송정파는 울산의 주요 사족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1685년부터 1757년까지의 구강서원의 원록에 나타난 성씨를 보면 학성이씨가 전체 202명의 과반인 104명이고, 밀양박씨가 27명으로 나타나 있다.
 그 뒤 박창우의 후손들은 처음 터 잡은 신계[신답(新畓)]마을에서 벗어나 10여리 떨어진 송정을 중심으로 종족마을을 이뤘다. 박창우 자신은 말년에 인근의 화봉에 옮겨 살았다. 박창우의 후손 중에서 차남 세도의 장남 천계(天啓)와 삼남 천보(天普)의 후손이 가장 번성했다고 한다. 천계의 후손은 범서 구영에 주로 살고 있고, 천보의 후손은 종족마을을 대표하는 곳이자 상징인 송정에 살고 있다. 송정마을에 처음 거주한 사람은 박창우의 증손자 이충이었다. 여기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대한광복군 총사령 박상진 의사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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