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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 꼼수가 대세다. 의견이 다르면 툭, 끝장토론부터 하자고 덤벼든다. 대놓고 '나는 꼼수다'를 외치는 인터넷 방송에 사람들이 기웃거린다. 사람들의 일상어가 갈수록 극단적이다. 하긴 시대가 변하고 일상의 문법이 변하니 소통의 수단과 방법도 달라지는 건 당연할지 모른다. 50대 사내가 70대 노모를 '엄마'라 불러도 좋고, 30대 사내가 50대 아비를 '아빠'라 불러도 좋다는 국립국어원의 공식발표 만큼 생뚱맞은 변화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꼼수와 끝장은 너무나 다른 말이지만 이 시대의 문법상으로는 동의어다. 사회정의나 합리적 절차 운운하는 기성세대의 정치문법에 배신감을 느낀 새로운 세대들의 문법이 꼼수와 끝장이다. 사회정의를 꼼수로 비틀고 합리적 절차를 끝장으로 꿇어앉히려는 청춘들의 패기가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현상이다. 전체 인구 8%가 사용하는 트위터가 92%의 여론처럼 떠도는 이유도 바로 꼼수와 끝장의 독특한 문법구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어떤 흐름 속에 스스로가 놓여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기성세대는 익숙한 문법을 포기할 수 없어 새로운 문법을 흉내만 낸다. 그러니 '보수꼴통'을 온갖 포장으로 분칠하고 꼼수에 나서고 끝장에 마이크를 잡지만 흉내의 끝은 초라하기 마련이다.

 대놓고 '나는 꼼수다'를 선언한 진보와 맞장을 뜨려면 '나는 보수꼴통이다'로 맞붙어야 하지만 그런 용기도 시스템도 없으니 맨날 하는 짓이 '나도 트위터를 한다'든가 '팔로워가 몇 명'이라는 식의 자기도취 정도다. 한나라당 이야기다. 딱한 노릇이지만 표심을 공략하겠노라며 겨우 생각해낸 것이 당대표의 대학가 호프 회동이다. 생각이 그 정도라면 호프잔이나 제대로 비우면 될 일인데 그마저도 구설에 오르는 모양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문제는 청춘의 문법을 학습하려는 것이 아니라 흉내내고 친한척하는 것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미 그들의 문법은 기성의 문법을 버린지 오랜데 버려진 문법으로 악수하고 너털웃음 웃다보니 번지수가 다른 곳에 연애편지를 전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한나라당이 이번에는 '환골탈퇴'를 외치고 있다. 아예 당명까지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환골탈퇴나 당명변경이 의지의 표현일 수는 있지만 골수까지 녹아 있는 기존의 문법을 바꾸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 문법은 시대를 읽는 방법이다. 꼼수나 끝장이 피켓을 들고 골목길를 휘젓고 다닐 때 호프집에 앉아 "꼴같잖은 게 대들고 X도 아닌 게 대들고. 이(여기)까지 차올라 패버리고 싶다. 내가 태권도협회장이다."고 이야기하면 정말 끝장이 난다. 한미 FTA를 놓고 "니가 이완용"이라고 삿대질하는 쪽에 대고 "니가 과거에 한 일을 국민이 알고 있다"고 맞고함 질러봐야 돌아오는 건 이완용이라는 꼼수와 끝장의 문법일 뿐이다.

 꼼수의 정체성은 비굴함이다. 정도로는 승부가 되지 않으니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꼼수다. 비굴함을 덮어쓰고 있는 꼼수는 비굴함 마저 포장한다. 문제는 그 포장의 재료가 '보수꼴통'의 문법에 있다는 점이다. 꼼수는 약점을 공략하는데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 상대의 허술함, 설핏 스치는 빈자리를 정확하게 공략한다. 바로 그 공략지점에 멋진 포장지를 두르고 깃발을 꽂는다. 그것이 바로 꼼수의 힘이다. 꼼수가 끝장과 동의어인 것은 상대의 핏대를 올리게 하거나 제풀에 주저앉게 만드는 문법 때문이다. 그 문법에 지금 한나라당이 철저하게 당하고 있다.
 관전자 입장에서 보면 꼼수와 끝장은 싸움꾼이다. 그것도 다양한 싸움의 기술을 연마한 기막힌 전사다. 여럿이지만 하나같은 속성에다 언제 어디서나 유용한 도구나 수단을 제공하는 머리가 툭툭 튀어나오는 카멜레온을 능가하는 싸움꾼이다. 상대는 비록 세상의 질서를 움직이는 권력을 쥐고 있지만 잃을 게 없는 꼼수가 웃통 벗고 달려드니 당할 재간이 없어 보인다. 그저 한가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시민이 뒷배가 되어주리라 믿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꼼수의 문법과 보수의 문법이 어긋나는 이지점을 우리는 지나치고 있다. 토론의 정체성이 듣고 말하며,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에 있지만 끝장토론의 정체성은 끝을 내는데 있다. 꼼수의 정체성이 비굴함에 있지만 그 비굴함이 기성질서의 도덕적 해이에 가려져 비굴함조차 훌륭한 무기로 보이는 것이 핵심이다. 대놓고 꼼수를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대놓고 끝장을 보자고 고함지를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자극적이고 특별해 보이는 것은 사람을 끌 수 있다. 하지만 바탕색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특별할 수 있기에 한번 해보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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