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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다문화가정 1세대로서 그들의 정신적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하는 가수 윤수일은 어린시절 음악을 통해 가슴속의 소외감을 극복했다고 말했다.

어릴 적 '혼혈'멍에로 많은 방황하다
아파하시는 어머니 위해 마음 다잡아
틈틈이 익혔던 기타연주·노래선물에
냉랭했던 주위사람 하나 둘 모여들어

1980년대 서구적인 생김새와 이미지로 '오빠부대'를 이끈 가수. 국민 애창곡인 '아파트', '황홀한 고백' 등을 부른 가수. 바로 '윤수일'이다. 울산 사람들에게는 '우리 지역 사람'이라는 데서 더욱 친근감을 안겨준다. 데뷔 34주년을 맞은 그는 최근 한 케이블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팬이었던 부인과 결혼하게 된 러브스토리를 공개해 화제다. 콘서트 수익금을 다문화 가정 어린이를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로 한 그는 전국 투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다문화 가정에 대한 그의 생각과 음악, 앞으로의 활동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최근 한 케이블 방송에서 데뷔 초 팬이었던 부인이 어머니를 간호 했다고 들었다. 팬과 스타에서 사랑이 싹튼 원인이 됐다던데, 부인은 어떤 생각으로 간호를 하게 됐다고 하던가?
- 데뷔 초 어머니가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많은 팬들이 꽃이나 영양식을 들고 병원에 찾아왔는데, 아내는 유일하게 빈손으로 와서 끝까지 남아 어머니를 간호했다. 그때 아내의 간호 덕에 어머니가 6년을 더 사셨다. 아내는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는 병든 노모를 모시고 가수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간호를 해야겠다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언제부터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나?
- 병원과 집을 오가며 간호를 하는 모습과 마음에 고마움을 많이 느꼈다. 어느 순간 고마움이 사랑으로 발전했다.

▲데뷔 초에 결혼을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기획사나 매니저, 주위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왕관도 버릴 마음으로 발표했고, 결혼했다.

▲콘서트 수익금을 다문화가정 어린이를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한다고 들었다. 그렇게 결심한 이유는 뭔가
-나는 한국 다문화 1세대이다.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겪어야하는 정신적 어려움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본다. 나는 뮤지션이기에 그들에게 음악과 콘서트, 장학금 등의 지원을 통해 그들의 외로움과 소외감을 달래주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울산도 그렇지만 전국적으로 다문화가정이 늘고 있다. 다문화가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나?
-내가 성장기를 보내던 시절 울산에는 다문화, 또는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에 관한 인식이나 관심은 전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울산을 통틀어 혼혈 아동은 나 외에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있었다하더라도 그 당시 울산의 정서, 즉 마치 동물원의 희귀동물을 보듯 하는 편견과 소외감을 견디지 못해 사회일원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해외 입양의 길을 택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국가에서도 알기에 가족을 설득해 해외입양을 독려했다. 내 어머니는 비록 현실은 냉혹하지만 한국에서 나를 키울 것을 끝까지 고집하셨다. 그 결과 오늘의 가수 윤수일이 존재하게 됐다.
 현재의 울산이 다문화 시대로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성장기를 보냈던 시절에 비해 시민들의 정서가 많이 변해 그들을 잘 보듬어주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행복하게 살게끔 많이 배려해주고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본다.

▲어렸을 적 주위의 시선때문에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 어떻게 극복했나
-평범한 소년, 소녀들도 성장기에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혼혈이라는 멍에를 안고 태어난 사람은 다른 평범한 친구들보다 몇 배의 성장통을 겪는다. 그 당시 나의 앞 길에는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불확실, 그 자체였다. 때로는 어머니를 원망도 해보고, 색깔이 다른 내가 친구들과 쉽게 어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학교에 가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싫었다. 방황, 반항, 좌절 등의 심정이 행동으로 나타나 주변에서 문제아로 비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행동으로 인해 더 심한 고통을 받는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내 스스로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틈틈이 익혀뒀던 기타 연주와 노래를 주변에, 그리고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평소 냉랭하게 대하던 학우들도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나와 끈끈한 우정을 맹세하며 나를 격려해줬다. 그런 과정이 내가 한 사람의 한국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줬고, 항상 가슴 속에 있던 소외감을 극복하게 해줬다고 생각한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잡기 위해선 제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나는 뮤지션이라 제도적이나 사회적 구조변화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단일민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요즘같은 시대에 소수의 단일민족을 강조한다는 것은 낙후된 생각이다. 또 100만이 넘어선 국내 체류 외국인 및 다문화가족들에 대한 세세한 제도적 배려와 구조적 문제점들은 전문가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 그들이 한국을 제2의 조국이라 생각하고 사회 일원으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면 앞으로 이 나라가 세계 속에서 활약하는데 기여를 하는 인재도 나오리라 생각한다.

▲데뷔한 지 34년이 됐다. 예전과 지금 음악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나?
-싱어송라이터로서 나의 노래는 나의 삶 자체이다. 때문에 변화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울산을 떠나 서울생활을 그린 <제2의 고향>, 어릴 적 장생포의 추억이 담긴 <환상의 섬>, 그리고 콘크리트 문화를 대변했던 <아파트>, 학교 졸업 후 첫 사랑과 이별을 뒤로하고 출세를 위해 떠나가던 심정을 담은 최근의 발표작 <터미널>에 이르기까지 나의 생활상이 내 음악에는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노래는 변화를 거듭하지만 이러한 나의 음악들에 공감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음악을 한다는 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23번째 앨범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나? 타이틀곡을 <앵무새>로 정한 이유는?
-데뷔 35년을 결산하는 의미가 담긴 윤수일의 23번째 앨범이다. 이 앨범에는 타이틀인 <앵무새>를 포함해 총 7곡의 자작곡이 수록돼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 밖에 없다는 평소 나의 소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앨범이다. 22집 <터미널> 이후 약 3년의 시간동안 음악적 동료인 밴드 멤버들과의 교류 외에는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은둔하며 작곡, 작사, 편곡, 그리고 레코딩을 총괄했다. <48번 국도>, <Radio Love>는 완성도 높은 모던 록 사운드를, <갈바람따라>, <철로>는 나만의 발라드 감성을 한 편의 시와 같은 가사로 부드럽게 표현했다. <앵무새>를 통해서는 인내심 부족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현대인들에게 기다릴 줄 아는 지혜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싶었다.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내년 35주년을 통해 나의 음악에 대한 정리를 하려 한다. 또 월드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기다리는 팬이 많다. 울산은 언제쯤 찾을 생각인가? 울산시민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
-내년 35주년 기념 전국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울산공연은 내년 5월쯤이 될 것 같다.
 내 고향 울산은 이 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데 최선봉의 역할을 한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형상의 스케일과 화려함에 더불어 문화적인 면에도 조화로운 발전을 이루길 바란다. 이를 통해 울산이 명실공히 일류도시로 성장했으면 한다. 울산시민들이 실제로 사람들이 살기 좋은, 그리고 살고 싶어 하는 울산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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