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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익은 천명을 지키고, 즐기는 편안한 삶을 추구한 조선후기 대문장가로 신라 말부터 500여명의 시를 모은 시선집을 남겼다. 사진은 병영일대 전경.

"옥류동의 안개와 노을에 비경이 펼쳐지니/ 높다란 청휘각이 속진(俗塵)을 떠나 있네./ 가을은 도성의 집집마다 내리는 빗줄기에 생겨나고/ 폭포는 푸른 산골짜기마다 울리는 우레를 마주했네./ 연꽃잎 움직일 때 물고기떼 흩어지고/ 나무 그늘 깊은 곳에 해오라기 돌아간다./ 노니는 이는 절로 돌아갈 것을 잊고서/ 처마 아래 밝은 달 뜨기를 머물러 기다리네."

 

남용익(南龍翼)이 절친한 벗 김수항(金壽恒)이 인왕산 옥류동에 청휘각(淸暉閣)이란 집을 세운 뒤 제영(題詠)을 청하자 지어 준 시문이다. 도성에서 가까운데도 세속의 먼지가 물들지 않은 청휘각에서 달이 뜨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야말로 고도로 수양된 인격을 갖춘 선비란 사실을 말하고 있다. 김수항을 넌지시 칭송하고 있음이다. 남용익의 시재가 유감 없이 드러난 작품이다.
 남용익이 속진을 벗어난 절승지로 꼽았던 인왕산 옥류동(玉流洞)은 18세기를 전후해서는 위항인(委巷人)의 시회처(詩會處)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위항인의 주류를 이룬 경아전(京衙前)이 그 자락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위항인의 수많은 시회 중에 1786년에 만들어진 옥계시사(玉溪詩社)가 가장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다른 종류의 사귐과는 달리 문학의 사귐이야말로 영원할 수 있다고 하여 시사(詩社)를 만들었다고 한다.
 
# 만년에 고향 수락산에 살면서 시 지어
만년에는 그 누구든 고향에 은거하며 유유자적의 삶을 살고파 한다. 남용익 또한 그랬다. 그가 귀거래(歸去來)를 염원한 고향은 남양주 수락산의 동해곡. 수락산은 김시습이 은거했던 매월당 옛 터가 남아 있던 곳. 15세기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년 뒤 당대의 명사 박세당(朴世堂)이 수락산 서쪽 자락을 차지했고, 동쪽은 남용익이 차지했다. 보만당(保晩堂)을 짓고 살았다.
 '보만당에서[保晩堂]'란 시가 그의 심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마을의 절구소리 울타리 너머 간간이 들리는 곳/ 내 집이 가장 먼저 옛 정을 끄는구나./ 술잔을 들고 연한 산나물을 탐내어 집고/ 책을 보다 훤한 들창가로 즐겨 나간다./ 매화가지에 달이 걸려 향기만 일렁이는데/ 잣나무에 바람이 불어 꿈조차 시원하다./ 다시 그대 손 잡고 귀거래했으니/ 긴 노래 짧은 시로 평생을 보내리라."

# 경상 좌병영에 병마우후로 재직
남용익은 울산의 경상좌병영의 병마절도사 다음 자리인 병마우후(兵馬虞候, 종3품)로 재직하면서 울산과 인연을 맺었다. 좌병영으로 부임하면서 쓴 '울산 병영으로 부임하면서 동생에게[將赴嶺南幕書翰弟扇留別]'란 시를 보자. 울산광역시가 펴낸 한시선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송수환 번역)'에 실려 있다.
 "홀로 남쪽 막부로 부임하는데/ 너는 어찌 나를 보내겠나./ 새벽녘에 푸른 꿈 꾸었더니/ 천리 밖 눈 덮인 산으로 가게됐구나./ 멀고 먼 험한 길 떠나려니/ 보고 또 보아도 보고픈 얼굴이지만/ 달 밝은 밤 높은 누대(樓臺)에서/ 잠시 한가로이 놀다 오겠네."

#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유배지서 쓸쓸히 숨져
남용익은 인조 6년(1628년) 서울의 낙산 기슭에서 부사를 지낸 아버지 득붕(得朋)과 어머니 신씨 사이에서 태어나 숙종 18년(1692) 유배지에서 외롭게 64년간의 삶을 마쳤다. 쓸쓸한 죽음이었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 시호는 문헌(文憲).
 인조 26년(1648년) 21세로 문과에 급제한 뒤, 시강원 설서와 사서, 사헌부 감찰과 지평을 지냈다. 병조와 예조의 낭관과 홍문관 부교리 등을 거쳐 잠시 외직에 나갔다가 중앙 관직에 복귀했다. 효종 6년(1655년)에는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파견돼서는 관백(關白)의 원당(願堂)에 절하기를 거절하여 음식공급이 중지되고, 협박까지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다.

 현종 때에는 대사간과 대사성을 거쳐 공조를 제외한 5조의 참판을 지냈고, 경상도와 경기감사로 나갔다. 숙종 초 좌참찬 등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숙종 13년(1687년)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이조판서가 됐다. 숙종 15년(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함경도 명천(明川)에 유배돼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숙종 20년(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관작을 되돌려 받았고, 임금은 특별히 '지난날의 일이 후회스럽다고 하교했다. 영조 원년(1725년)에 문헌(文憲)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효종·현종·숙종 3대에 걸쳐 청화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문명을 날렸으나 선비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늘 근신하고 근면했다. 단 한 차례의 실수도 없었다고 전한다.

 후손 중에도 뛰어난 이들이 잇따랐다. 증손 남유용(南有容)이 형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고, 문청(文淸)이란 시호를 받았다. 유용의 아들 남공철(南公轍)이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다. 8세손 남병철(南秉哲)은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했다. 병철의 아우 남상길(南相吉)도 이조판서지냈고,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받았다.

 

   
▲ 병영성은 조선 태종 때 설치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으로 남용익은 종3품인 병마우후로 울산과 첫 인연을 맺었다. 시간이 흘러 성은 곳곳이 허물어지고 객사는 사라졌다. 당시 객사임을 알수 있는 초등학교 정문앞에 남은 하마비.


 
# 신라 이후 500여명 시 모은 시선집 펴내
그는 문장에 특히 능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조선 전기의 서거정(徐居正)·중기의 허균(許筠)·후기의 남용익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대문장가였다. 시 창작은 물론 비평과 선시(選詩)에 이르기까지 고전시학의 전 분야에 걸쳐 뚜렷한 업적을 남긴 문인으로 꼽힌다.
 그의 '팔월 보름날 밤에[八月十五夜]'란 시와 '비를 무릅쓰고 송산을 나오며[冒雨出松山]'란 시를 보면 감성 어린 시심을 엿볼 수 있다. "온 세상이 모두 밝은 밤/ 비단 같은 구름 티 하나 없다./ 하늘은 가을 노인 애련하여/ 흰 연꽃을 띄워 내보내셨구나." "말을 몰고 동쪽 교외로 나아가니/ 종일토록 비가 내려 도롱이 걸쳤도다./ 밥 짓는 연기가 작은 마을에서 솟으니/ 가을이 저무는 것을 이제야 알겠노라."

 조선 후기의 문단을 주도한 남용익은 한시의 원류를 찾거나 동일한 미의식의 근원을 찾아 작가와 작품의 경향을 평가하는 방법을 비평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백과 두보 등 당시(唐詩)에 기운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송시(宋詩)나 명시(明詩)의 가치도 긍정적으로 수용함으로서 각 시대의 장점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우리 한시의 시대별 변화와 풍격을 제시했다. 시대변천에 따라 시풍의 흐름이 변화할 수 밖에 없음을 분명히 인식한 것. 그의 풍격론이 중국의 풍격론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시대별 특징을 고려하며 확대·세분한 것은 단순히 중국비평을 모방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후대 비평가는 평가하고 있다.

 그런 안목을 지녔기에 신라 말의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에서부터 조선 현종 때의 김석주(金錫胄)·신정(申晸) 등에 이르기까지 497명의 시를 모아 조선의 바른 시가(詩歌)란 뜻을 지닌 14권 7책의 '기아(箕雅)'란 시선집(詩選集)을 펴냈다. 그 밖에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기록한 사행록(使行錄)인 '부상록(扶桑錄)'이 있다. 효종 6년(1655년) 6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9개월간의 기록. 시문집으로 18권 9책의 '호곡집(壺谷集)'이 있다. 방대한 내용 중에 한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1,200여 수가 전한다.

 

   
▲ 병영성은 조선 태종 때 설치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으로 남용익은 종3품인 병마우후로 울산과 첫 인연을 맺었다. 시간이 흘러 성은 곳곳이 허물어지고 객사는 사라졌다. 당시 객사임을 알수 있는 석축만 남은 병영성.

#'천명을 지키고, 즐기는' 편안한 삶을 희구
남용익은 환갑이 넘어 고향 땅 남양주 수락산 동해곡에 늘그막을 보존한다는 뜻의 보만당(保晩堂)을 지어 칩거했다. '십오당(十吾堂)'이라고도 했다. '내 논밭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食吾田)', '내가 판 우물을 마시고(飮吾泉)', '내 천명을 지키고(守吾天)', '내 집을 스스로 짓고(結吾椽)', '내 밭둑길을 따라 걷고(依吾阡)', '내가 지은 시를 읊조리고(吟吾編)', '내 거문고를 연주하고(鼓吾絃)', '내 분수를 지키고(守吾玄)', '내 졸리는대로 편안하고(安吾眠)', '내 천명을 즐긴다(樂吾天)'는 것. '늦은 밤 산중에서 술을 따르며[山中夜酌]'란 시가 그런 삶을 그리고 있다. "태수는 그 음악을 즐기나/ 곁의 사람은 그가 알지 못함을 안다./ 산중의 사람은 신선의 천분이 모자라/ 다만 취하여 집안의 못을 익히노라."

 그러나 세상이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겨우 이태 남짓을 편안히 지냈는가. 불안한 정국에 휩쓸려 엄혹한 귀양길에 올랐다. 귀양지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그래도 그의 시는 남아 오늘 우리를 우수에 잠기게 한다. 한시선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에 실려 있는 '김수익 학성 유배소를 찾아[過鶴城金濟州壽翼謫所留贈]'란 시와 '김수익 울산 유배소[過蔚山金濟州壽翼謫居]'란 시를 차례로 보자.

 "띠풀집 쓸쓸히 대나무 울타리 둘렀으니/ 굴원 같은 그대 삶이 이토록 처량한가?/ 관산에서 길 잃으면 그 누가 나그네 아니던가/ 울산에서 그대 만나니 약속한 듯 하구나./ 여름날 동백섬에 무더운 비 내리고/ 물안개는 언제나 석류나무 적셔주네./ 구름 사이 나르는 한 마리 까치여/ 상담(湘潭)에 가서도 초사는 읊지 말게." "삼년만에 다시 그대 집 찾으니/ 바닷가 석류나무는 제 철 만나 꽃 피웠네./ 영화와 고난은 모두가 꿈 속이려니/ 이별하는 오늘 밤엔 다시 뗏목 띄우세./ 그대 장한 뜻에는 파도도 깨어질 듯하고/가의(賈誼)의 수심에 해도 서산에 비껴섰네./ 아침 까치 지저귀니 풀려날 조짐 알겠구나./ 한 독 술에 남은 흥취는 서울에서 나누세." 남용익이 울산에서 귀양생활을 한 김수익을 생각하며 이 시를 지을 당시에 훗날 자신의 유배지에서의 외로운 죽음을 생각이나 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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