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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땅 옛글 향기] 19.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서정적 시재로 마음 울린, 짧았지만 청빈한 삶
2011년 12월 06일 (화) 18:51:08 김종경 kimj@ulsanpress.net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한쪽은 큰 강이 흐르고 있는데,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의 집들은 모두 나무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전지(田地)는 본래 척박하여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제일 먼저 들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항산(恒産)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략(中略)-- 그래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는 실정이고,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먹어야 연명할 수 있습니다." 고단하고 곤궁한 백성의 삶이 절절이 담겨 있는 황준량(黃俊良)의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의 한 부분이다.

   
▲ 황준량은 퇴계학파의 대표적 학자로 경상도 감군어사로 울산에 들러 서정성 깊은 시를 남겼다. 마흔 일곱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 외직에만 머물렀지만 그는 문장으로 백성을 살린 '이문활민'의 표상이었다. 사진은 금계의 시 배경이 된 태화루 건립예정지 일대.

황준량은 41세인 조선 명종 12년(1557년)에 단양군수로 나갔다. 고을은 남아 있는 집이 없을 정도로 피폐했다. 백성들이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고을을 등지고 흩어진 탓이었다. 고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4천800자의 명문장으로 이뤄진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다. 조정에서 현실적으로 채택할리 없는 이상론에 치우친 방안을 담는 한편, 논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구체적인 조항을 담은 계책도 넣었다. 공납(貢納) 등 열 가지 폐단을 없애 줄 것을 요구한 것. 그의 치밀한 계획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의도대로 성사됐다. 백성이 다시 모여 들고, 단양고을은 살아났다. 문장을 통해 백성을 살린 '이문활민(以文活民)'이었다.

  퇴계학파 학자로 20여년 관직생활
   문장으로 백성 살린 이문활민 표상
   경상도 감군어사로 울산에 들러
  '태화루 유람선 운을 따라'등 남겨

# 청빈·애민의 목민관이자 문인학자
짧은 마흔 일곱해를 살다간 황준량은 진실로 백성을 사랑한 목민관이자, 뛰어난 학자요, 문인이었다. 우리 국문학사에 우뚝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가(漁父四時歌)'에 영향을 준 것이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어부가(漁父歌)'라면, 어부가에 영향을 준 것은 그의 시였다. 물론 그의 시는 당연히 앞 세대인 이현보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풍류를 이어받아 자신의 시에 보다 구체적으로 구현했다. 그는 이현보의 손자사위였고, 자연스레 영향을 주고 받았던 것. 그런 인연으로 퇴계문하에 들었고, 퇴계학파의 맏형으로 꼽혔다.

 황준량이 단양팔경 중에 '구담봉(龜潭峰)'과 '옥순봉(玉筍峰)'을 읊은 시를 보자. "서리 내린 붉은 벼랑엔 가을 맑은 물 고요하고/ 거룻배 모는 이는 옥(玉)병풍 안으로 들어가네./ 천태만상이 화락에 쌓여 부족함이 없으니/ 화옹(畵翁)과 시선(詩仙) 모두 아직 할일이 없어라." "매어 달린 듯 깎아지른 절벽은 하늘에 오를 듯 하고/ 새로 간 장검은 거울 속에 꽂혔네./ 누가 달여울에 가로 앉아 시선(詩仙)을 부를 것이며/ 늦게 취하여 신(神)의 솜씨의 묘함을 알 수 있으랴./ 일 많은 내 가을 얼굴을 한번 쓰다듬으니/ 푸른 물결 가운데 옥 같은 병풍이 높이 꽂혔더라./ 어떤 사람이 능히 불러 선계(仙界)에 이를 것이며/ 묘하게 깎고 새긴 공을 같이 상줄 수 있으랴."

 그가 경상도 감군어사(監軍御史)로 울산에 들러 지은 '울산에 봄이 오니[次蔚山軒韻]'란 시에서도 빼어난 시재를 볼 수 있다. 울산광역시가 펴낸 한시선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송수환 번역)'에 실려 있다. "이슬비에 봄 기운 감도니/ 붉은 꽃 푸른 잎이 봄 따라 산 오르네./ 방초 우거진 나루터엔 조그만 어물가게/ 산봉우리들 끝에는 깊은 바다 어귀/ 유한한 이 세상에 세월도 덧없는데/ 울산 땅에는 음율을 아는 이도 없구나./ 가슴에 쌓아 온 부질없는 생각들/ 동해 바다 기울여 이 수심을 씻을꺼나."
 
# 퇴계학파의 맏형으로 학문에 정진
황준량은 중종 12년(1517년)에 경북 풍기(豊基)에서 아버지 황치와 어머니 창원황씨 사이에서 태어나 명종 18년(1563년) 마흔 일곱의 나이에 숨졌다. 본관 평해(平海). 자 중거(仲擧). 호 금계(錦溪).
 24세인 중종 35년(1540년) 문과에 합격해 관직에 들었다. 성균관 학유와 박사, 전적을 지냈다. 공조와 호조, 병좌좌랑, 지평 등을 거쳤다. 명종 6년(1551년) 경상도 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됐으며, 그 때 울산에도 들러 울산의 풍광을 읊은 시를 남겼다. 감군어사는 지방의 병영과 수영의 폐단을 감찰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 뒤 주로 외직에 머물렀다. 신녕현감과 단양군수를 지냈다. 단양군수를 지낼 때 앞에서 언급한 단양진폐소를 조정에 올려 단양고을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단양을 떠나자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 송덕비를 세웠다. 구(舊)단양향교 앞에 있다. 명종 15년(1560년)에 성주목사로 재직할 때 병에 걸려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예천에서 죽었다.
 그의 20여년의 관직생활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목민관으로서 역할에 전력했다. 교육을 부흥시키고 민생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업적을 남겨 선비와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신녕에 백학서원을 창설했다. 단양향교를 중수하고, 우탁(禹倬)을 배향하여 학풍을 일신했다. 성주에서는 영봉서원을 중수하고 학풍진작을 이뤘다.

 그의 학자로서의 자질은 퇴계를 만나면서 날개를 더욱 폈다. 퇴계로부터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주자서(朱子書)를 꼼꼼하게 배웠다. 퇴계와 문답과 토론을 통해 의문을 해결해 나갔다고 한다. 퇴계학파의 중심학자로서 성리학 서적도 펴냈다. 성주목사 재직 때에는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기본서로 애독되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10책을 간행했다. 유림의 숙원을 해결한 것.
 명종 5년(1550년) 어느 날 홀연 찾아온 제자 황준량에 대해 퇴계는 시(詩)를 지어 반겼다. '퇴계 초옥으로 황금계가 찾아온 것을 반겨(退溪草屋喜黃錦溪來訪)'란 시(詩). "시냇가에서 님을 만나 의심난 것 토론하다./ 막걸리 한 사발을 그대 위해 마련했다네./ 조물주가 매화꽃 더디 피운 것을 아쉬워하여/ 일부러 잠깐동안 가지에 눈꽃 피게 했네."
 
   
▲ 황준량은 울산에서 '울산에 봄이오니''태화루 유람선 운을따라'등 같은 시를 남겼다. 사진은 동헌.

# 스승에게 심우(心友) 같았던 제자
퇴계는 황준량이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고 평가했다. 물건이 생기면 어버이를 봉양하고, 동기들에게 나눠줬다. 이웃의 어려운 사정을 알면 힘껏 도왔다. 그래서 20여년의 벼슬살이에도 죽었을 때 염습에 쓸만한 천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 아름다운 산수를 지날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풍경을 보며 배회하고, 시를 읊느라 밤이 되도록 집에 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속세에 미련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라고 했다. 심우(心友) 같았던 제자를 앞 세운 스승의 마음은 어땠으랴?

 안연(顔淵, 공자의 제자)이 서른 둘의 나이로 죽자 공자는 "하늘이 망쳤다. 하늘이 나를 망쳤다"고 거듭 통곡하며, "안연은 나를 아버지같이 보았는데, 나는 아들로 대하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아마 퇴계도 공자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손수 제문을 짓고, 행장을 썼다. "슬프다. 금계가 이에 이르렀는가. 성주에서 풍기까지 몇 리나 되기에 연로에서 죽다니. 하늘이 이 사람을 어찌 그렇게도 빼앗는가. 참인가. 꿈인가. 참 황막하여 목이 막히네. 슬프다. 금계요! 한 번 가면 돌아오기 어려우네. 끝이 났네. 끝이 났네. 슬프고, 슬프도다." 그렇게 퇴계는 제문에서 통곡했다

 행장의 말미에서 "나 황(滉)이 공(公ㆍ황준량)을 농암 선생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어서부터 서로 함께 따르기를 가장 오래하며 친밀히 했는데, 우둔하여 들은 바가 없었던 나로서는 공을 얻어서 깨우친 점이 많았다. 서로 내왕하며 옛날의 정을 다시 가꾸자는 언약(言約)이 있었으나 공은 항상 내가 늙고 병이 들어 몸을 보존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했다. 어찌 오늘날 늙고 병든 자는 세상에 남아 있고, 오히려 강건한 나이의 공을 곡(哭)할 줄 알았으리요. 공의 언행은 기록할 것이 많으나, 다 감히 기록하지 못하고 오직 큰 것만을 추려서 서술한다. 혹 다른 날 붓을 잡는 자가 상고(詳考)하길 바라며, 이 졸렬한 문장으로는 다 찾아내어 밝히지 못한다. 오호라 슬프다. 가정(嘉靖) 42년(1563년) 12월 어느 날 진성(眞城) 이황(李滉) 행장을 짓다"라고 썼다.

 황준량은 노년에 고향 땅에 스승 퇴계처럼 정사(精舍)를 짓고 책을 읽으며 도(道)를 강론하는 곳으로 삼고자 했다. 뜻을 이루기도 전에 마흔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자신이 꿈꾸던 고향 땅에서의 노년의 삶을 시로 읊어 남겼다. "휘어 꺾여 맑은 산골 물을 따르고/ 얽히고 돌아 끊어진 다리를 건너네./ 언 구름이 돌구멍에서 피어나고/ 찬 눈이 소나무 끝에 쌓이네./ 자리를 편 듯 바위 모양이 예스럽고/ 병풍을 두른 듯 산이 높네./ 봄이면 한 초가집에서 돌아가서/ 고기 잡고 나무하면서 늙으리."

# 스승 퇴계가 손수 편집한 문집 '금계집(錦溪集)'
황준량의 문집 '금계집(錦溪集)'은 내집(內集) 5권과 외집(外集) 9권 등 모두 14권 5책으로 돼 있다. 시는 830여 수가 실려 있다. 스승 퇴계가 손수 편집했다. 명문장가이자 학자로, 정치가로 명성이 높았던 이산해(李山海)가 발문을 썼다. 퇴계학파의 대표적인 학자 정구(鄭逑)도 나중에 나온 외집을 편찬했다. 그의 서정적인 문학과 성리학적 세계관이 농축된 문집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시 '엄천 마을(嚴川村)'을 보자. "높은 고개 향하여 새벽에 떠나/ 엄천 마을에서 물을 쫓아간다./ 여기저기 산은 가는 곳마다 좋고/ 깊숙한 곳을 가다가 길을 잃었다./ 묵은 돌에 푸른 등나무 꼬이고/ 깊은 숲 속에선 괴이한 새들 울어댄다./ 풍광은 다투어 촉발되어/ 맑은 경치를 가히 읊을 수가 없도다." 서정성이 풍성한 그의 시세계에 마음이 울린다.

 울산에서 지은 시도 마찬가지다. '울산에서 벗을 만나[次蔚山軒韻贈李君景瑞]'와 '태화루 유람선 운을 따라[次太和樓船韻]'란 시를 보자. "천리 밖 강남 땅을 꿈에서도 그렸더니/ 반가운 눈 마주하니 진정 감흥이 그윽하네./ 바닷가 짙은 안개에 가을이 깊었는데/ 등불 앞 얘기꽃에 밤이 벌써 삼경이네./ 오색 구름 피어나 은빛처럼 퍼지고/ 술잔에 담긴 술은 옥빛을 머금었네./ 벼슬아치 일행이라 풍류깨나 배웠으니/ 우리 함께 손 잡고 돛단배를 띄우세." "곡우날 갓 개어 짙은 안개 걷히니/ 태화루 아래에는 조각배가 떴구나./ 맑은 내 방초에도 최호(崔顥) 같은 시인 없어/ 저무는 해오라기 섬에서 속절 없이 노래하네."

 2017년이 그의 탄신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8월 초 '금계 황준량 탄신 500주년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사업준비에 들어갔다. "하늘의 기틀은 순환하여 멈춤이 없고/ 흘러가는 물은 단 한 번도 멈추어 쉰 적이 없네./ 활발한 도의 근원이 눈 앞에서 밝게 빛나니,/ 심원한 하늘의 이치는 여기에서 합쳐져 함께 돌아가네." 그가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순리대로 살면 삶은 화평할 것이요, 뜻한 바는 꼭 이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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