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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박물관이 개관 두번째 기획전시로 일제강점기 시절의 울산을 담은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 특별전을 열고 있다. 이번에 울산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전시물은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울산 자료 78점이 대여 전시된 것이며, 미야모토 기념재단 등이 소장하고 있는 당시 흑백사진과 동영상도 함께 관람객들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의 바탕은 1930년대 울산을 조사한 동경제국대학 조사팀의 조사자료가 남아 있기에 가능했다. 일제강점기 때 울산에 살았던 주민들의 생활상을 조사한 자료는 물론 가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자료가 어떻게 축적된 것이며 조사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특별전에 전시되거나 상영되는 자료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이었던 동경제국대에서 수집한 자료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지휘한 주민생활 조사는 울산만이 아니라 전국 주요거점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주도면밀한 계획아래 진행됐다. 조사의 목적은 당연히 식민지로 강제병합한 조선반도는 물론 조선인들의 골수까지 내선일체화 하겠다는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이른바 식민지 정책의 3단계 사업으로 조선민족을 철저하게 일본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 벌인 제국주의의 야욕이 유산처럼 남아 오늘 울산에서 전시되는 셈이다.

 조선총독부의 조선반도 장악은 부동산은 물론 유동자산과 인적자산, 정신과 영혼까지 일본화 하려는 더러운 욕망의 시나리오였다. 이 작업을 손쉽게 해결해 준 조선인들도 많았다. 식민사관의 선봉장이었던 이병도부터 작은 마을의 일본인 순사 앞잡이까지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했다. 그 중에는 동경제국대에서 공부한 한 울산청년의 순수한 고향사랑조차 식민화와 내선일체화에 동원되기도 했다.
 적어도 이 같은 사실을 가린 채 '75년만의 귀향'이라는 거대한 문패를 달고 일제에 의한 자료를 전시하는 것은 불편하다. 더러운 역사이거나 난장의 역사이거나 치욕의 역사일지라도, 그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일은 우리의 시선이 미래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섬나라 왜놈 근성을 표백제로 세탁해 동아시아 대륙의 주인임을 주장하려는 야욕이 총구와 포탄으로 생산되던 시절, 그들은 왜 한반도 곳곳에서 생활상을 엿본다는 명분으로 농촌생활을 조사해 갔는지는 짚어주는 것이 맞다. 그런 전제 없이 마치 향수를 자극하고 오래된 화첩을 넘기듯 과거의 우리를 만나는 이벤트에 열중하는 것은 바로 75년전 아무것도 모른채 왜인들의 물음에 대답하고 안방과 부엌살림까지 내다보인 앞세대의 우울한 자화상을 재연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달리마을의 생활상을 조사한 동경제국대가 어떤 곳인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화에 분칠한 일제가 조악하고 왜소한 왜놈의 본체 위에 아시아의 주인이자 세계제국의 일원으로 둔갑술을 발휘할 때, 그곳은 바로 화장술과 둔갑술을 만들고 가르친 산실이었다. 동경제국대의 교수들이 주축이 된 조선반도 식민지사령탑은 강제병합 이후 빠르게 조선의 모든 것을 세탁해 갔다. 그 첫 작업이 조선의 정신을 뺏는 일이었다. 오래된 왕릉을 뭉개고 우뚝한 산맥에 쇠말뚝을 박는 일은 시작이었고 오래된 역사의 기록을 불태우고 조작하는 것은 치밀하고 조직적인 전술이었다.

 1910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 '취조국'은 우리의 공식 기록물은 물론 일반 가정에서 보관하던 각종 생활, 역사서 20만권을 약탈했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지방에서는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 세도가 등을 샅샅이 수색했다. 과거의 기록을 약탈해 불쏘시개로 쓴 일제의 다음 단계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그 출발이 1922년 구성한 조선사편찬위원회다. 이 작업이 무려 16년 동안 진행됐고,  1938년 완성된 역사서가 일제패망 이후 국제 사회에서 조선, 혹은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과거사로 유포됐다. 우울한 이야기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우리의 역사가 왜곡된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제가 유독 과거사 말살과 역사날조에 매달린 것은 100년, 아니 몇 세기를 내다본 야욕이었다. 조선을 거치지 않은 인적 물적 교류는 불가능했다는 태생적 한계를 너무나 잘 알기에 조선의 역사와 조선인의 생활상 모두를 왜놈의 시각으로 바꿔놓을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한마디로 일제는 역사적 열등감과 이에 수반되는 조선침략 명분을 세탁하고 둔갑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했고, 그 산물이 울산 달리 만이 아니라 수천 수만권 분량의 자료로 아직 일본 땅 곳곳에 남겨놓고 있다. 바로 그 흔적이 뽀얀 치장을 하고 '75년 만의 귀향'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서 있기에 낯설고 황당한 마음에 해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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