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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이 즉위한 1399년 7월 중순에 울주 해안에 적조현상이 발생했다. 확산되는 적조에 몹시 놀란 고을 수령들은 양산 통도사에서 적조현상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기양제를 지냈다. 사진은 통도사. 울산신문 자료사진

요즘도 여름이면 울산의 바다에는 적조현상이 일어나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는 한다. 조선시대에도 다르지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옛 문헌에는 울산에서 일어난 지진과 홍수 등 자연재해가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에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자연재해는 적조였다. 정종이 즉위한 1399년 7월 중순에 울주 해안에 적조현상이 발생했다. 이 적조는 확산을 거듭해서 다음달 초에는 동래 앞 바다까지 뒤덮었다. 몹시 놀란 고을 수령들은 양산 통도사에서 적조현상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기양제를 지냈다.
 최초의 홍수기록은 태종 때였다. 태종 5년(1405년) 울주와 경주에서 큰 홍수가 발생했다. 인근 고을에도 역시 큰 물난리가 일어났다. 울주를 비롯한 여덟 고을의 농사가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작황의 손실이 무려 6-7분, 즉 60-70%에 이른다고 했다. 한 해 농사를 완전 망쳤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백성들의 삶의 고단함이 눈에 선하다.


 지진이 처음 일어난 기록은 태종 때였다. 태종 10년(1410년) 11월에 언양과 동래 등지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지진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는지는 적혀 있지 않은 점으로 미뤄 미미했음을 추측할 수가 있겠다. 이후 지진기록이 연달아 나왔다.
 17년 뒤 세종 9년(1427년) 9월 15일에 언양과 울산에 지진이 있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세종 때에는 자연재해가 수시로 일어났다. 다음해 세종 10년(1428년) 5월에는 울산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에 태풍이 내습해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고 했다.
 세종 12년(1430년) 4월 중순에 울산을 비롯한 경상도에 지진이 일어났고, 이듬해 세종 13년(1431년) 5월에 울산과 기장, 김해 등지에 또 지진이 발생했다. 한동안 뜸하던 자연재해는 세종 21년(1439년) 6월에 울산 등지에 짙은 황무(黃霧)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세 해 뒤에는 심각한 가뭄으로 큰 고통을 겪은 것으로 나왔다. 세종 24년(1442년) 6월에 울산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에 심각한 가뭄이 발생해 곳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기우제까지 지냈다면 수개월간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가뭄이 이만저만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벼락에 맞아 숨진 사례도 나왔다. 단종이 즉위한 1452년 6월에 울산군 백성이 벼락에 맞아 죽은, 뇌사(雷死)했다고 했다. 괴이한 일을 풀게 한다는 뜻의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고 했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1455년 7월에 울산을 비롯한 경상도에 풍수해 피해가 심했다고 했다.
 문헌 기록에 뜸하던 자연재해는 성종 때에 들어와 구체적으로 인명피해 숫자까지 적혀 있다. 성종 10년(1479년) 8월 중순에 경상도 일대에 큰 물난리가 났다. 언양현도 큰 수재를 당해 흙더미에 깔려 죽은 압사자(壓死者)가 20여명이나 됐다고 했다. 피해 가구는 31호로 나타났다.
 중기인 중종 때에는 거의 매년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중종 7년(1512년) 4월에 울산 등 경상도에 지진이 났다. 중종 11년(1516년) 7월에 울산에 해일로 민가 17채가 유실됐다. 다음해 여름에는 언양 등 경상도에 수해가, 그 다음해에는 언양과 경주 등 경상도 우박피해가 심했다.


 중종 15년(1520년)부터 중종 29년(1534년)까지는 우박이 내리거나, 바다에 적조가 일어나거나 지진이 일어났다. 심지어 벼락으로 사망자도 발생했다. 매년 갖가지 재해가 일어나 백성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했다. 특히 중종 21년(1526년)에는 울산 등 경상도에 전염병이 창궐해서 220여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거기에다 황충(蝗蟲)까지 발생해서 수확할 농작물이 없을 정도로 먹어치웠다. 울산에서도 임금의 명으로 범서 입암에서 제를 지냈다. 명종 때에는 중종 때만큼은 재해가 심하지 않았으나, 간간히 가뭄과 수해, 지진이 있었다. 호조에서 언양과 울산에 구황(救荒)을 했다.
 인조 21년(1643년) 6월에는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쳤다고 했다. 현종 11년(1670년) 여름에는 언양에서 홍수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수백채의 집이 무너졌다. 울산에서도 10명이 숨졌다. 전염병까지 발생하자 제사를 지냈다. 숙종 3년(1677년) 2월에 울산에 괴질이 일어나 열흘간 34명이 숨졌다고 했다. 이후 영조와 정조 순조, 철종 등 조선 말까지 갖가지 재해로 백성들의 참상은 끔찍했다. 예나 이제나 자연이치를 거스르지 않아야, 재해도 줄일 수 있음을 문헌기록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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