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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망의 인지 시점을 두고 말이 많다. 대통령이 나서 "미국과 일본도 우리가 인지한 시점과 비슷한 시각에 알았던 것 같다"고 밝혔지만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첩보능력이 우습게 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첩보는 과거나 현재 모두 중요한 사안이다. 국가는 물론 기업에 있어서도 첩보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이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자들은 첩보전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정보기관은 명나라 영락제 때 설립된 '동창'이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영락제는 친조카까지 살해한 원죄 때문에 언제나 가까운 이들을 경계했다. 그 의심이 낳은 첩보기관이 동창이다. 영락제는 가장 신임하는 환관을 동창의 수장으로 삼고 측근들의 안방을 뒤졌다. 영락제 이외에도 비밀첩보기관을 거느린 왕들은 많았다. 특별한 이름을 갖지 않은 왕의 남자들이 가능한 왕의 치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인 조직이었기에 사료에 남은 기록이 적을 뿐이었다. 실제로 첩보기관은 기록으로 남은 것이 동창이지만, 그 이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나 우리의 삼국시대 때도 '간자'나 '세작'이라는 이름으로 첩보요원들이 상대국의 움직임을 은밀히 염탐했다.

 현대사에서 첩보의 기록은 화려하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중앙정보국, 이른바 CIA이다. CIA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사정보 수집과 특수공작을 위해 전략사무국(OSS)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졌다가 이름이 바뀐 정보조직이다. 그 대척점에 있던 소련도 첩보전에서는 미국에 뒤지지 않았다. 낯익은 이름인 'KGB'가 그것이다. CIA와 KGB는 현대 첩보전의 대명사가 됐고 냉전시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때인지 최근 CIA는 미국 언론에 뭇매를 맞고 있다. 김정일 때문이다. 김정일의 급사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정보력이 미국 언론의 도마에 올랐지만 CIA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CIA나 KGB만큼 유명세를 타진 않았지만 사실은 양대 조직보다 광범위한 정보력을 가진 조직이 '모사드'다.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만든 비밀첩보조직 모사드는 암살공작으로 유명하다. 인류사에 드물게 '조국을 위한 암살은 불가피하다'는 암살 용인국가 이스라엘의 뒷배 때문에 모사드는 적국의 수뇌를 소리소문없이 제거하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유태인의 적, 아돌프 아이히만 납치나 '검은 9월단'에 대한 피의 보복 등 모사드의 활약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김정일의 급사 이후 우리 정보당국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됐다. 중앙정보부로 시작한 정보기관은 안기부와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했지만 정권에 휘둘리면서 그 고유의 기능이 변질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문제는 우리 정보조직의 인적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느냐는 점이다. 혹자는 우리 정보당국이 김정일 급사를 까맣게 몰랐다는 것이 우리 정보기관의 현주소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볼 일은 아니다.
 오래 전 존재했던 간자나 세작의 기능을 하는 '휴민트'의 부재가 당장 문제다. 정보원이나 내부 협조자 등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얻은 정보가 휴민트(HUMINT)다. 휴먼(human)과 인텔리전스(intelligence)의 합성어다. 휴민트의 부재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 교류 확대에 따라 대인 정보수집 라인을 축소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물론 첩보위성이나 무인정찰기 등이 제공하는 영상자료와 감청 등으로 얻는 음성정보 등이 첩보의 중요한 자료가 되지만 여전히 첩보는 인적 네트워크의 기반이 있어야 살아 움직이는 정보가 된다. 바로 그 살아 움직이는 정보의 부재가 김정일 급사에 먹통이 된 셈이다.

 한 야당 의원이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국가정보원과 외교통상부가 17일 오전 김정일 사망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고, 국정원은 청와대에 보고까지 했으나 청와대가 묵살했다"는 폭로를 했다. 한편에서는 3대 세습의 주인공, 김정은이 지난 1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발표 전에 북한군에 '대장 명령 1호'를 하달한 것과 관련해 우리 군이나 정보당국의 무감각한 대응을 질타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에서 아시아 담당 고문을 했던 마이컬 그린조차 "우리는 북한의 붕괴에 대비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며 "북한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자책하고 있다.
 '동네복덕방'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국정원의 위신이 말이 아니다. 휴민트의 붕괴니 첩보능력의 한계니 비난이 쇄도한다. 문제는 첩보의 출발선이 권력에 있다는 점이다. 권력의 속성과 뒷배가 어디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첩보의 더듬이는 진화하기 마련이다. 당장 조문 문제를 두고 남남갈등이 치열한 우리 사회에서 대북 정보기관에 대한 묵시적 지지가 확보될 리 만무하다. 과거의 행적 때문에 언제나 미운오리새끼 대접을 받는 정보기관의 위상부터 바로세워야 죽은 밀실조직이 살아 움직일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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