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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3일 열리는 울산공업센터 지정 50주년 기념식에 센터 지정과 조성 과정에 기여한 산증인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참석하기로 해 기념식이 더욱 의미있게 진행될 예정이다. 오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1960~70년대 청와대와 상공부에 근무하며 경제수석과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 맡아 울산공업센터를 직접 입안하고 건설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울산만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눠 동쪽은 중공업단지, 서쪽은 화학단지로 개발하는 방안을 제시해 현재 울산의 국가산업단지가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중심, SK와 S-OIL 중심으로 각각 발전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지난해 울산이 연 수출 1,000억달러, 국내 무역규모 1조억 달러라는 대업을 달성하는데 밑그림을 그린 역사적 인물이다. 다음은 울산공업센터 지정 배경과 개발의 의미, 그리고 미래 지속성장을 위한 방안 등에 대한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의 일문일답이다.



   
 
△경제개발을 시작한 지 50년, 울산이 공업특정센터로 지정된지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경제개발의 첫 삽을 뜨신 그때와 지금의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감회가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한국경제 발전의 근간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당시에는 6.25 이후 피폐해진 국가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에 따라 1억달러, 10억달러, 100억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하고 공업입국으로 가기 위한 조선·자동차·석유화학·철강 등의 산업을 육성했습니다. 계획에 따라 일사천리로 목표를 달성한 것입니다. 1962년 2월 3일 열린 기공식 때 박정희 의장은 "울산의 건설은 빈곤의 역사를 떨치고, 민족의 숙원인 부귀를 마련하기 위한 의지가 깃든 우리나라 공업화라는 거대한 작업의 첫 출발입니다. 이것이 곧 민족부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며,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고,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금년도 우리나라는 무역고 1조억 달러를 이루었습니다. 즉 우리나라는 그 간 산업혁명을 이룩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합니다.
 
△오 전 수석이 제시한 '한국형 경제건설'의 첫 출발이라 할 수 있는 공업센터를 울산에 지정한 배경인 무엇입니까.


-울산에는 태화강이 있어 기본적인 공업용수를 충당하고 거기서 부족하면 낙동강에서 물을 끌어 쓸 수 있는 입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공장을 세울 만한 넓은 땅이 있었고 항만을 만들 수 있는 지형을 갖고 있으며 철도만 연결해 주면 물류수송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후나 용지, 항만, 수송 등 여러 가지 여건이 가장 뛰어나다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 울산공업센터 정유공장 전경.(1963년)
△덕분에 지난해 울산은 수출 1,000억달러 달성이라는 우리나라 무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이 같은 경제성장 이유를 진단한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국태민안'을 이룩하는 길은 오직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는 그런 각오를 가지고 1차 5개년계획부터 5차 5개년계획까지 계속해서 경제개발을 실시했습니다. 그 기본이념은 '수출제일주의 공업입국'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수출은 계속 늘고 공업은 발전해서 2011년 1조억 달러의 무역고를 올렸고 울산도 수출 1,000억 달러를 달성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수출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최근에는 대외 변수에 취약함을 드러내고, 내수 부진이라는 상황을 낳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떻게 보십니까.


-아직도 우리나라의 국가기본시책은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국가방침에는 현재에도 변함이 없으며 이를 추진하는 기본 동력은 기술혁신을 해서 경쟁력 있는 세계최고 제품을 만들어서 수출하는 길 외에는 없다고 봅니다. 이것은 또 절대적 원리이고 변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최근에 대외 변수에 취약함을 드러내고 있다면 이것은 기술개발에 소홀히 했고 수출경쟁력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 1962년 2월 3일 지금의 남구 장생포동 납도마을(현재 효성 울산공장 동쪽언덕)에서 역사적인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거행했다. 기공식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송요찬 내각수반, 김유택 경제기획원장관, 샹바르 주한외교사절단장(왼쪽부터)이 시삽을 하고 있다.
△지난 50년간 경제발전의 터를 닦은 주역으로서, 앞으로 향후 50년을 내다보고 울산이 준비해야 할 일이 있다면, 제언해주시죠.


-산업의 피라미드 구조가 무너져서 중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는 정부가 방임해서는 안되는 분야입니다. 지금은 수출이 늘어도 고용이 늘지 않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 수출이 늘어도 핵심부품을 일본에서 죄다 수입해서 쓰고 있으니 부가가치는 물론 고용창출 효과도 떨어지죠. 앞으로 국제경쟁력에서 이기는 오직 단 하나의 길은 선진공업국이 되는 것입니다. 즉 기술개발 및 혁신, 제조설비의 현대화, 기술자 양성 및 후원, 최고품질의 제품생산 및 수출확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앞으로 울산이, 더 나아가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보시는지.


-'기술강국'이 되는 길은 정부에서 해야 할 일도 기업가가 해야 할 일도 있지만 기술자 및 근로자들과 일체 단결해 좋은 물건을 값싸게 만들어서 수출하는 길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보다 강력한 기술강국(技術强國)의 나라로, 또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나라로 성장해 나아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또 한 가지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근로자는 직장을 자기 가정과 같이 생각하고 기업가는 종업원을 자기 가족같이 생각하는 회사기풍을 조성하는 것이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울산시민들이 이 모든 면에서 전폭적인 지원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50년, 100년의 기념일에는 우리나라가 더 부국강병의 나라가 되고 세계일류의 공업기술국이 되길 바랍니다.


■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
오원철 전 수석은 박정희 정권 때 경제 제2수석 비서관으로 활약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기술관료)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시작하던 1960년대 주요 산업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 인물이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박 대통령으로부터 근정훈장을 수여 받았고 박 대통령은 그를'국보'와 같은 존재라며'오 국보'라고 부를 정도였다.
 오원철은 1) 경제건설 2) 인력양성(기술교육, 근로의욕 고취) 3) 국토개발 4) 자주국방을 4대 지주로 삼는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이념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활약한 핵심적 정책 수립가였다.
 현재 그는 '남은 인생'을 걸고 1992년 7월부터 집필에 매달려온 <한국형 경제 건설> 시리즈(전 10권 목표)의 저술에 힘을 쏟고 있다. 산업화 과정의 실무적인 추진과정을 각종 증언과 관련자료, 비화 등을 꼼꼼히 기록한 대하 기획물로 현재 7권까지 출판됐다. 그가 갖고 있는 소박한 바람은 1960년~ 70년대 그의 경험을 정리하고 그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이끌어내어 후대에 남김으로써 한국사회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1928년 황해도 풍천 ▲1945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입학 ▲1951년 서울대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졸업 ▲1957년 공군 소령 전역 ▲1957년 시발자동차 회사 공장장 ▲1960년 국산자동차주식회사 공장장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 ▲1970년 상공부 차관보 ▲1971년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1974년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 ▲1992년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 ▲1998년~현재 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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