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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발굴된 오한기 초모산 유적. 제단과 무덤이 함께있는 초모산 유적은 완만한 야산 아랫부분 해발 40m쯤에 자리잡고 있는데 남쪽으로는 대릉하지류인 노호산하가 흐르고 있다. 시야가 확 트인 이 곳에 무덤을 마련하고 제단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들이 신격화한 인물상을 안치하고 제사의식을 베푼 것으로 보인다.

종교는 하나의 신앙으로서 의식 형태의 영역에 속한다. 원시 종교는 선사인들의 생활 속에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당시 사람들은 자연계에 대한 신비감을 지녔을 것이다.
자연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세상의 모든 동·식물을 비롯해서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다 보니 갖가지 숭배 사상과 행위가 발생했다.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인물상을 보면 수준 높은 예술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우상 숭배, 즉 인체소상을 신격화하여 숭배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울산지역에도 나타나는 것을 보면 홍산문화가 이 곳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종교는 하나의 신앙으로서 의식 형태의 영역에 속한다. 원시 종교는 선사인들의 생활 속에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당시 사람들은 자연계에 대한 신비감을 지녔을 것이다.
 자연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세상의 모든 동·식물을 비롯해서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다 보니 갖가지 숭배 사상과 행위가 발생했다.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인물상을 보면 수준 높은 예술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우상 숭배, 즉 인체소상을 신격화하여 숭배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울산지역에도 나타나는 것을 보면 홍산문화가 이 곳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 자연현상을 극복하려는 간절한 대상

동산취 제사유적에서 나온 임신한 여인의 조각상(왼쪽)과 홍산 문화 영향을 받아 형태가 유사한 울산 신암리 '흙으로 빚은 여인'상.

홍산문화가 꽃핀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및 대능하(大凌河) 상류에서 각종 인물상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 인물상들은 연대가 비교적 명백하다.
 기원전 5,000년 이전의 흥륭문화는 요하문명 가운데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이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신령 숭배의 관념이 있었다. 내몽고 동부의 임서현(林西縣), 백음장한(白音長汗) 흥륭와문화 집터에서 우상 숭배의 초기 형식이 발견되었다.
 반 수혈식 집터 내의 중앙에 석조반신인상(石雕半身人像)이 세워져 있었다. 이마는 돌출되고, 눈 구멍은 깊게 파였고, 코는 거칠게 조각되었으며, 가슴과 배에는 대칭된 돌기가 있다. 인물상을 만든 사람은 여성을 강조 하려는 의도였던 것같다. 이것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인체 조소상이다. 비록 조형이 거칠고 단순하지만 인체의 주요 부분을 신성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발굴 당시 얼굴은 문 입구를 향하고, 하체는 지하에 묻힌 채, 거주지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인물상이 방안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을 보면 그들에게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흥륭와문화의 석조상은 모호한 감각을 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조각 공예 기술이 낮고, 그들의 의식 속에 신령의 형상에 대한 충분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제작한 조소품은 애매모호한 형체를 나타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령 형상을 집안의 중심에 놓은 것은 여러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가옥의 신, 또는 불의 신, 생식 및 성기능 등을 보호하는 신으로 짐작된다.
 신령 우상은 그들의 기원, 소망의 의지물로서 자연현상을 극복하려는 힘을 신령에게 구하는 간절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 인체와 실제크기인 여신도 존재해
붉은 산봉우리의 홍산(紅山)이 있는 적봉(赤峰)의 서수천(西水泉) 유적에서 잔편(殘片)인 소형 조소인상이 발견되었다. 인상(人像)의 잔고(殘高)는 3.8cm로, 여성의 반신 형상이다. 가는 허리와 다리, 높이 솟은 유방, 그리고 정연된 각선미를 강조 했다.
 이러한 표현은 홍산문화의 신상 숭배는 인격화로 향한 한 단계 진일보한 것이라 하겠다. 신령에 이미 성별이 뚜렷하며 여신의 신령이 이미 기본적으로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홍산문화에서의 우상 숭배는 후기에 발전되었다.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동산취와 우하량(牛河梁)의 시기는 기원전 3,500~3,000년 정도이다. 이 시기에 뚜렷한 변화가 보인다.
 먼저, 여신 숭배는 이미 개별적 의식을 벗어나, 즉 개체 가족 단위의 신상을 공양하는 형식을 벗어나 종교 신앙으로 발전되었다. 부락보다 더 큰 공동체 단위로 발전해, 숭배 장소를 거대한 건축물로 이루어냈다. 이의 변화에 적응하는 증거는 여신의 형체가 증대되고 형상이 다양화되었다. 동산취의 여신은 인체의 2분의1이며, 우하량 여신은 인체의 실물 크기와 거의 동일하다.
 신상을 만들 때는 갈대와 나무틀을 조형으로 삼거나 인체의 모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들의 숭배가 이미 인격화 한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숭배 대상이 지속적으로 커지면서 동시에 원래의 소형 토제 조소상도 여전히 존재 했다. 동산취와 우하량 모두 소형 토제 조소상이 발견되었다.
 
# 신의 사자로 무당의 출현
동산취에서 발견된 2개의 조소상은 제단의 돌을 쌓아 놓은 대지의 동북쪽에서 발견 되었다.
 발견된 조소상은 임산부 형상이다. 이러한 인물상의 특징은 유방이 강조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임산부의 상징으로 복부가 융기 되어 있다. 이러한 형상을 서수천기 묘조(苗條)의 여인상과 비교하면 뚜렷한 변화가 있다. 당시 큰배를 가진 임산부는 미(美)의 상징이며 씨족과 부락 번영의 표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여신을 상징하는 여인상은 부락을 보호하고 종족의 번성이 순조롭도록 기원했을 것이다. 다산은 농경의 풍요를 불러오고 가축의 번식, 지모(地母)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었을 것은 당연하다.
2001년 적봉시 오한 초모산에서 발견된 석조 인물 두상으로 이제까지 발견된 인물상 가운데 가장 예술미가 돋보이는 조각품이다. 붉은 응회암으로 만든 이 인물상은 파손된 채 머리부분만 온전하게 나타났다.


 홍산문화 후기의 신상, 즉 인물상 숭배의 또다른 변화는 대형 종교시설 건축과 함께 신상이 전문 요원에 의해 관리되고 제사 의식을 베풀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의 사자(使者)로서 신을 위해 생활했을 것이다. 신을 섬기는 자, 곧 무당(巫師)이다. 원시 종교세계는 무당이 제사장이다. 이 계층의 출현은 신에 대한 종사자들로서 지식과 기능의 소유자였으며 그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부락민들로부터 절대적 우상으로 추앙되었을 것이다.
 이들 계층의 출현에 따라서 종교적 행사에 종사할 전문인들도 탄생되었을 것이다. 묘단(廟壇)을 건립하고 조소 신상인 인물상을 제작하는 전문인들도 있었을 것은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 적봉 초모산 발굴 두상 예술미 돋보여
인물상 조소자들은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지식도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원시 종교 발전과 함께 예술적 감각도 점진적 발전을 가져 왔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당시 혈연 관계로 연결된 씨족사회가 점차 해체되면서 사회권력이 특수 신분인에게 넘어가는 구조의 변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우상숭배의 정신적 소산으로 나타난 신격의 인물상은 홍산문화의 수준을 격상시켰다. 홍산문화의 절정인 동산취 유적과 우하량 유적의 인물상들은 홍산인들의 정신세계를 정화시키고 구심점을 이루게 했다. 2001년, 적봉시(赤峰市) 오한 초모산(草帽山)에서 발견된 석조 인물 두상은 이제까지 발견된 인물상 가운데 가장 예술미가 돋보이는 조각품이다.

 붉은 응회암(凝灰岩)으로 만든 이 인물상은 파손된 채 머리부분만 온전하게 나타났다. 이제까지의 홍산문화 인물상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인체의 실물을 보는 듯한 정교한 얼굴 표현은 대단히 엄숙해 보인다. 굳게 다문 입에다 지그시 감은 눈의 표현은 신상의 신비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제단과 무덤이 함께있는 초모산 유적은 완만한 야산 아랫부분 해발 40m쯤에 자리잡고 있는데 남쪽으로는 대릉하(大凌河)지류인 노호산하(老虎山河)가 흐르고 있다. 시야가 확 트인 이 곳에 무덤을 마련하고 제단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들이 신격화한 인물상을 안치하고 제사의식을 베푼 것으로 보인다.

 발굴 당시 인물상은 파손된채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제의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인물 신상을 파손한 것으로 보고있다. 사실적으로 조각한 이 인물 신상은 특정한 장인이 특수 목적으로 제작한 작품일 것이다.
 현재 오한기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이 인물상을, 공개 되기전 박물관의 배려로 처음 대하는 순간 숨 막힐 듯한 감회를 느꼈다. 오늘 날 세련된 조각가가 정성들여 조각한 것 처럼 예술성이 빼어난 인물 두상은, 어쩌면 홍산인 자체를 신격화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원시 종교의 발전, 특히 제사 중심지의 건립과 제사 활동의 지속적 진행은 조소품 제작과 함께 사회 조직의 발전등 적극적 작용이 발생했다. 제사 의식 활동과 관계된 장인들은 사회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했을 것이다. 여기에 크고 작은 인물상이 홍산문화를 융숭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신앙적 요소가 담겨 있는 인물상, 고대인의 우상이었던 여인상은 한반도 남단인 울산에 까지 전래되어 서생 신암리의 비너스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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