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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대한민국 만세!"
그 날의 함성은 올해도 어김없이 울산 하늘 위로 울려 퍼진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울산에서도 독립을 향한 외침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울주군 언양읍 언양읍성. 지난 2일 언양읍성 일대에서는 지역주민과 학생 등 1,000여명 군중의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날의 함성이 공기를 타고 하늘로 퍼진지 올해로 93년째다. 울산지역 독립운동을 펼쳤던 독립열사들의 사연은 무엇일까.

   
'울산 병영 3·1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에서 시민과 학생 등 참가자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울산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언양의거'
울산지역에서 가장 먼저 펼쳐진 만세운동은 '언양의거'다. 특이하게도 이 언양의거는 지역 천도교들이 나서서 독립을 외쳤다.
 천도교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수운 최제우가 1860년 경주에서 동학을 전도한 것이 시초다. 그 세력은 점차 확장해 부산, 청도, 안동, 대구등지까지 퍼져나갔다. 물론 울산, 경주와 인접했던 언양도 마찬가지. 1910년 일본으로부터 치욕적인 '한일합방'을 당하고 나서 동학사상에 대한 불씨는 더욱 커졌다. 이 때 최해규는 상북거리에다가 교구를 두고 주민들에게 동학사상을 전파했다. 그의 노력에 이규장과 이규로, 이규인, 이무종, 곽해진, 유철순, 김교경 등도 교인으로 동참해 함께 동학사상을 포교했다.

   
1919년 4월 '언양의거' 상황을 재현하는 참가자들.

 독립운동이 언양 일대에 전파된 것은 천도교 김교경 교구장이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뒤로부터다.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국민회보의 기사를 언양교구로 보냈고, 3월에는 상경한 이규장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해주며 언양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쳐줄 것을 당부했다. 이규장이 다시 언양으로 돌아오자, 언양 교구들은 중진회의를 개최해 언양독립만세운동의 거사를 결의했다. 그리고 4월 2일 오전 11시. 언양장터 한 모퉁이에서 건장한 청년이 "대한민국 만세!"라고 소리 높혀 외치며 독립선언문이 일대에 흩어져나갔다. 그러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 천명이 만세운동 대열에 동참했다.
 

 그러나 찬란했던 만세운동 뒤에는 안타까운 죽음도 있었다. 일경의 발포로 독립열사 중 한 명인 곽해진의 모친 길천댁(김씨)과 정말조, 김종환 등 17명이 부상을 당하고, 허 황, 신동목, 박채우 등 26명이 구속돼 모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언양의거'는 이들의 희생 끝에 그 어느 고장의 만세운동에 손색없이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다. 이 후 이규장, 이규천이 선두가 되어 거리교회 내 교실을 증축하고, 양정학원을 개교해 교편을 잡아 학생들에게 민족애를 심어줬다.
 현재 작천정 입구에는 언양의거를 기리기 위해 '3·1운동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청년들이 나선 '병영의거'
중구 병영에서 발생한 의거는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돼 있던 '병영청년회'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펼쳐질 당시 그곳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청년회원 한명조와 이영조가 3월 초 귀향해 청년회 회원들에게 고종황제 독살설과 3·1만세운동의 전말을 전했다. 이들은 청년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이형우, 이종욱, 이문조, 박형하, 이종건, 양성룡, 김장수 등과 거사를 준비했다. 

   
울산병영3ㆍ1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유족, 주요기관 단체장, 학생, 시민 등 5,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중구 병영초등학교 및 병영사거리 일원에서 열렸다.
 

 이들은 4월 4일 태극기를 품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 교정으로 모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당일 11시. 하늘 위로 축구공이 높이 날아오르자, 청년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 나왔고, 거리에는 주민 수백명이 동참해 "만세"를 외쳤다. 이날은 일경이 무차별적으로 총검을 휘둘러 어쩔 수 없이 해산 했지만, 청년들과 군중들은 다음날 다시 일신학교 인근에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펼쳤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적은 큰 깃발을 앞세우고 거리로 달려나온 1,000여명은 진압에 나선 일경과 육박전을 벌였다. 안타깝게도 엄 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 등 4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송근찬, 김규식, 김두갑 등 3명은 중상을 입었다. 또 이종근 등 20명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광복이후 생존한 애국지사와 유족들은 병영 3·1운동의 의의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순국한 열사 26명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4월 6일 추모제를 지내오고 있다. 1955년에는 3·1사 봉제회를 만들어 길이 그들의 뜻을 받들어 오고 있으며, 울산병영 삼일사에는 '삼일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매년 울산 병영 3·1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펼쳐오고 있는 삼일사봉제회는 올해는 기간을 늘여 오는 7일까지 행사를 펼친다. 올해는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축구대회까지 곁들여 보다 풍성하게 치러진다. 6일 열리는 고유제는 3·1사당에서 거행되며, 이어 삼일사에서 병영사거리까지 0.8㎞ 구간에서 삼일만세운동참여자, 일본기마병, 일본순사, 풍물패, 대형태극기 등이 행렬을 이루는 3·1독립만세운동기념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퍼레이드 이후 병영사거리에서 시립무용단의 삼고무와 삼일만세운동재현 단막극, 주민가요제가 1, 2부로 나누어 진행된다. 또, 7일은 3·1독립만세운동기념 친선축구대회와 자전거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원로들이 주도한 '남창의거'

   
지난해 남창 온양초등학교 운동장과 그 일대에서 열린 '남창기미 4·8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에 참여한 시민, 학생 등이 거리를 행진하고 있는 모습.

울주군 남창의거의 주도자도 단연 주목할 만 하다. 당시 온양면과 웅촌면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학성 이씨 문중 원로들이 주도를 한 것. 독립운동사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다. 이씨 문종의 문장이었던 웅촌면 석천리 이재락은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 그는 3·1 독립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귀향했다. 그리고 바로 문중원로 8명과 봉기를 결의했다. 이들은 문중의 젊은이들이 동참하도록 "을사협약과 경술국치의 원한을 참아왔는데 독립운동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으니 의로써 살고 의로써 죽을때다.
 

   우리마을 청년들은 남창장에 모여 거사하기 바란다"는 '통고문'을 만들어 문중 청년들에게 배포했다. 통고문을 본 이수락, 이선걸, 이중걸, 이용락, 이일락 등은 4월 8일 남창장터로 나가 태극기를 나눠주며 대한독림만세를 선창했고, 잇따라 수백명의 함성이 장터를 가득 채웠다. 이 의거로 이수락, 이쾌락, 이희계, 이쾌경 등 10여명이 일경에 체포돼 징역형을 받았다.
 

 현재 남창지역에서는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남창 3·1의거 기념비를 온양초등학교에 건립해 뜻을 받들고 있다.
 이날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운동재현행사는 올해도 열린다. 올해로 제7회째인 남창기미4·8독립만세운동재현 행사는 남창 3·1운동기념선양회의 주최로 오는 7일과 8일 이틀간 온양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마련된다. 도움말=울산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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