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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가을께였다. 내가 살고있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소공원 벤치에 앉아있을 때였다. 주머니에서 진동으로 돌려놓은 핸드폰이 떨고있어 얼른 귀에다 대는데 낯선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최아무개라는 사람이 맞습니까?" 그녀는 무척 흥분된 어조였다.
 '순간 무슨 이런여자가 다 있을까?...' 하는데 다음으로 내 뱉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최아무개씨가 맞구나! 맞지요?"
 "그렇습니다만 전화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일단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면서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목성을 낮추기는커녕 당장 뛰어와서 쥐어박기라도 할 태세였다.
 

 "이보소 내가 누구든 말든 그거는 알 필요없고요"
 "알 필요없다니 전화를 했으면 흥분하지말고 내가 알아듣도록 내가 누구라고 밝히고 내가 알아듣도록 천천히 말하도록 하세요. 뭣 때문에 그럽니까?"
 "뭣때문에나 마나 당신이 왜 만사람이 다 존경하는 우리 스님 앞을 왜 가로막고 서느냐 이 말이야. 고마 두고바라고요. 우리 스님의 원력으로 일본에서 울산으로 잘못간 동백나무는 꼭 부산으로 돌아올끼니까…"
 "뭐요? 동백나무가 울산으로 잘못왔다고요?"
 

   내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더 할말이 없었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필시 오색팔중 동백을 두고 하는 소리다'하고 짐작을 하는데 곧 이어서 동백과 함께 박삼중이라고 하는 그 스님이 오버랩 되었다. 20년이 된 일이지만 당시의 기억만은 생생히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가 내보이던 행적으로 보아 능히 뒷말이 생길 수 있거나 또 눈살을 찌푸리게하던 여인네들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사적삼을 걸친 스님이란 분인데… 하면서 잊고 지내버렸다.


   그리고 나서 1년이 지난 작년이었다. 울산 문인협회장이던 문송산 시인이 부산에서 또 그런 얘기가 들린다면서 그 진의를 물어왔다. 너무 어이없는 일이라 소상한 경위를 다 말하지 못했고 문시인 또한 내가 투병중이라 길게 말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동백에 따른 사실적 경위를 지난해 울산문화를 돌아보면서 하는 내용으로 울산신문에 연재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전부이고 그 외의 진실이 아닌 것은 더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며칠전 그 박삼중 스님이 20년전 일본에서와 아줌마부대를 이끌고 울산에 나타나 오색팔중 동백 귀환 20주년을 기념한답시고 법석을 떨게 되었으니 내가 이제 참 답답한 지경에 이르고 만 셈이 되었다.
 

 오색팔중 동백은 부산의 동백섬에서 가등청정이 가져간 것이 아니고 울산의 학성(鶴城)에서 가등청정이 훔쳐갔는데 헌다식을 한다면 울산의 차인들이 해야할 일이지 왜 부산의 그 여자들이 와서 법석을 떨어야 한단 말인가.
 

 울산 차인연합회 홍국희 회장이 이끄는 차인들만도 수백명이 넘고 모두가 모범된 차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가? 또 박삼중 그 스님이 울산의 동백을 두고 무슨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하늘을 우러러 증언하건데 박삼중 그 사람은 오색팔중 동백에 대해서 더 이상 이와같은 행동으로 울산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불도를 닦는 스님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1989년 1월 15일 이 동백을 처음 발견하고 나서 3년후인 1992년 5월에 당시 문 백 울산시장이 주재한 회의에서 시민대표로 파견되어 가져와서는 울산시청 뜰에다 심은 것이 어제 일 같은데 왜 이제와서 이런 법석을 떠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고보면 3년전 내가 부산의 낯선여인으로부터 뚱딴지 같은 전화를 받게된 그 배후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한다. 아니, 의구심이 아닌 사실인 것이 틀림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하건데 그건 울산시 승격 3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오색팔중 동백을 귀환한 것이라 내 것도 아니고 어느 누구 것도 아닌 바로 울산시민의 것임을 밝혀둔다. 더 이상 울산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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