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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크리스트 백작의 작가인 알렉상드르 뒤마에 대해 시기하고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뒤마의 아들은 버럭 화를 내거나 맞받아치는 욕 대신 "감사합니다. 제 아버님은 큰 강과 같은 분이시지요. 그래서 그 강변에서 소변을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답니다" 라는 공손한 말 한마디로 아버지를 치받들고 외려 상대편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제압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고매한 그의 인격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말은 상호간 의사전달 수단으로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는 사회 속에서는 당연히 많은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관객을 모으기 위한 상업적인 영화에서나 나오는 막말이나 쌍욕들이 차안에서, 골목길에서, 심지어 학교에서도 예삿말처럼 흘러나오니 이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씨(시)버린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학교 폭력이 이슈화되면서 학생들의 언어생활이 아주 큰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학생들이 사용하는 욕설이나 격한 언어들은 곧 바로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말은 뇌의 정보로, 구피질에서 만들어내는 감정을 조절하기 때문에 순화된 말을 사용하면 뇌에 순화된 정보가 입력되어 감정도 순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언어순화교육이 바로 학생 인성교육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언어사용은 버릇이고 습관이다. 어릴 때부터 바르고 고운말을 사용하는 환경에 노출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습관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며, 이어 학교교육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우리 사회도 공동으로 책임져야할 사항이다.
 

 그런데 주위에는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어른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국가와 국민을 이끌어 갈 정치인으로 나서겠다는 사람이 자신과 이념이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막말과 비속어를 해대는 것을 보면서 아연실색 하였다.
 거기에 박수를 치고 동조를 하는 지성인(?)들도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에게는 자녀도 없었고, 어른들을 보고 자라나는 학생들이 안보였나 보다.
 

 자신의 이념만을 내세우면서 거르지 않고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이 신세대들의 박수를 받고 썩은(?) 기성세대를 엎어 참신한 주역으로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일등 문화를 이끌어갈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 그러고서는 우리 아이들에게만 바르고 고운말을 쓰라고? 참으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우리집 아들래미가 유치원에 다니던 여섯 살 쯤이었던가? 함께 버스를 탔는데 빈자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기특하게도 아들 녀석이 '어머니, 앉으세요' 하면서 나의 손을 이끌었고, 버스 내에서 그 장면을 보시던 어르신 몇 분이 말씨가 예쁘다며 아이 칭찬을 얼마나 하시던지 심지어 용돈을 꺼내 집어주시는 분도 있었으니 그 짧은 한마디의 말이 마음을 밝게 하였던 모양이었다. 아니, 워낙 욕설이 난무하고 높임말도 잘 쓰지 않는 사회적 풍토 속에서 당연한 높임말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었다고 짐작되었다.
 

 우리말과 글은 그 낱말 수 뿐만 아니라 존칭어와 평어로 나누고 더 세분되면 극존칭어까지도 구분되어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엄청나다.
 말은 의사전달 수단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지위와 환경, 품격 등을 동시에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말은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막말과 비속어로 함부로 내뱉는 사람들을 어른이라 칭하며 내 이웃이라고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더구나 위정자로 나선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다.
 

 선거 기간 동안 우리는 씨버리는(시버리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이젠 말에서 독소를 빼고 상대를 배려하고 서로의 품격을 깎아내리지 않는 고운 말들을 듣고 싶고 나누고 싶다. 나부터 또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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