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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사회의 주역이 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전혀 차별받지 않고 좋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부모의 사망 혹은 이혼 등으로 어린 시절부터 외롭고 고단한 삶을 꾸리지 않으면 안되는 청소년들이 구김살 없이 밝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일은 훌륭한 교육정책 목표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지향이 곧 평등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평등'은 오랜 역사를 두고 인류가 꿈꾸어 온 이상이지만 그것은 항상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측면이 있다.
 교육의 이상은 물질적 생활의 평등이 아니라 개인이 지닌 독특한 잠재능력을 발휘하도록 적극 돕는 데 있다. 도시의 어린이들이 누리는 학습 환경을 시골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누리도록 해주어야 할 필요성은 적을 수 있다. 시골의 도시화를 추진하기 전에는 그리할 방법도 마땅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골이나 어촌의 어린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천연의 혜택을 가꿈으로써 독특하고 의미 있는 교육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사교육을 학교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상으로 모든 학생들이 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또 값비싼 사교육의 관행을 부정하는 논리도 내포하고 있다. 터무니없는 과장 홍보로 학부모들의 관심을 끌면서 엄청난 과외비를 받아내는 일은 반드시 규제해야겠지만 사교육 전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사교육을 학교교육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얼마간 한계가 있다. 우선 학교와 학원은 그 존재목적이 다르다. 학교는 훌륭한 시민을 기르기 위한 인간교육 기관이다. 사회의 특성화 전문화 경향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의 엘리트를 기르려는 노력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 기초는 역시 전인교육의 바탕이어야 하는 것이다. 학원을 비롯한 여러 사교육기관들은 인간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개개인의 특수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훈련기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개별적인 욕구를 다양하게 충족시켜야 할 필요성 때문에 사교육의 폭은 상당히 넓을 수밖에 없다.
 학교가 교육수요자들의 욕구를 최대한 수용할 필요는 있겠지만 전면적으로 해소해 주기는 어려운 일이고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학습 또는 훈련의 질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학교가 모두 수용하려 하기보다는 전문적인 인력이나 기관에 맡기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과도한 사교육비일 것이다. 재능과 소질은 가졌으면서도 돈이 없어 아이를 키우지 못한다면 개인은 물론이려니와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재능은 있다고 생각되지만 돈이 없어 고민하는 학생들을 선별해서 장학금을 지급하면 된다. 학교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적절한 기준에 의해 대상자를 선발하고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며 보다 경제적일 수 있다. 수영과 음악 미술 등은 양식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가지씩 키워야 하는 기능 또는 예능일 것이다. 그런 것들은 학교시설을 갖추어 점차 학교교육과정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교육을 부정하고 이를 서둘러 학교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은 성급하고 사려 깊지 못한 감이 있다. 교육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고 단시간에 변화되기 어려운 특징을 안고 있다. 변화의 속도가 좀 더디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미덕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사교육의 문제를 해소하고 안정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학교교육을 내실 있게 가꾸는 일이다. 학교와 학원의 기능을 혼동시킬 수 있는 성급한 조치들은 또 하나의 시행착오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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