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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성도착증에 빠졌다. 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인터넷을 뒤지는 남자들과 이들을 가려내려는 경찰이 한 달 동안 쫓고 쫓기게 됐다. 경찰은 넥타이와 츄리닝을 가리지 않고 눈빛이 느끼하면 잡아 세운다. 비상근무령에 상시 감시 시스템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성도착증 환자들을 가려낼 태세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발생한 나주 여아 성폭행이나 통영 초등생 성폭행 살인까지 하나같이 피해자의 이웃 아저씨들이 악마로 돌변했다.
 

   시민들의 여론도 맹렬하다. 사형집행을 해야 한다부터 화학적 거세는 당연하고 물리적 거세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원인을 '남자의 물건'으로 보고 아예 잘라버리라는 식이다.
 화학적 거세나 물리적 거세 모두가 성범죄의 원인을 남성의 성적 욕망에서 찾고 있는 결과다. 최근의 보도를 보면 마치 대한민국 40대 남자들은 잠재적 성범죄자 쯤으로 취급당한다. 성범죄자 가운데 40대 남자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피해자의 이웃이나 친인척 등 근거리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식이다. 통계의 오류는 40대 남자들의 입지를 좁히고 있지만 실제로 변태적 성충동이 40대쯤에서 고개를 든다는 증거도 많다. 이른바 '로리타 증후군'이 그렇다.
 

 성적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는 이성이 마비되는 시점이다. 이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적 욕구를 제어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고 이로 인한 웃지 못할 오해도 많았다. 불가의 스님들은 이른바 오신채(五辛菜)를 금기하는 방법으로 성욕을 다스렸다. 다섯가지 매운맛이 나는 채소는 마음의 평정심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불가의 식단에서 제외됐다. 실제로 오신채의 금기가 스님들의 성욕 억제 수단이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음식과 인체는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 인스턴트 음식이 판을 치고 자극적인 식품이 식탁을 장악한 현대 사회에 범죄가 흉포화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성직자들의 성욕을 금하기 위해 먹는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오만, 인색, 성욕, 분노, 식욕, 질투, 태만 등 7가지 죄악을 정해 성직자들의 금욕주의를 강조했다. 이 가운데 식욕과 성욕은 하나로 보았다. 금식일에 육식을 금지하고 생선을 먹게 한 것도 식욕이 동반하는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잠재우기 위한 수도원의 비책이었다. 하지만 성욕의 억제가 음식을 통해 가능하리라는 추론은 어리석은 일이다. 불가는 물론 수도원의 남자들 가운데 지극히 일부이겠지만 충동억제의 임계점을 넘은 사내는 남색이나 자위, 월담으로 욕구를 해소했다.
 

 문제는 넘쳐나는 성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방어대책이다. 국민의 눈에 적절한 대처를 보여줘야 하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경찰의 목을 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것이 불심검문과 비상근무령이다. 거리에서 경찰복을 입고 불심검문에 나서고 24시간 출동태세로 지구대 불이 환하면 일단 국민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경찰이다. 정치권은 거리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게 한계가 있다 보니 법으로 호소한다. 거리에서는 고작 어깨띠를 매고 '성범죄 추방'을 외치는 게 고작이나 입법기관답게 법으로 이야기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처벌과 형량의 강화다. 몇 번 만 더 사건이 터지면 대한민국에도 종신제 형량이 나올 수 있고 사형수들의 집행날짜도 빨라질 수 있을 것 같다. 당장 사형제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이같은 분위기는 오래전 바빌론 왕국에서 시작된 함무라비 대왕의 원인제거형 양형주의가 되살아난 느낌이다. 기원전 17세기 바빌로니아제국의 왕 함무라비는 왕국의 질서 유지를 위해 방대한 법제작업을 실시했다. 그 결과물이 세계 3대 법전으로 불리는 함무라비 법전이다.
 

   1901년 프랑스의 고고학자에 의해 페르시아의 폐허 속에서 발견된 함무라비 법전은 거대한 석판에 쐐기문자로 새겨진 방대한 법전이다. 흔히 함무라비 법전 하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보복적 형벌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공개법전으로  내용 역시 무조건적인 보복보다 사회적 보편타당한 합의점에 근거했다. 물론 아버지를 때린 자식은 그 손목을 자른다는 식의 법 조항이 '이에는 이'로 회자되고 있지만 요즘 자주 발생하는 아동 성추행과 관련한 양형조항은 없어 아동 성범죄에 대한 과거의 처벌을 참고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함무라비 왕이 법전을 만들어 백성들이 회람할 수 있게 한 것은 무엇보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법집행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바로 법치의 실현이 갈등을 최소화하고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이 무려 기원전 1700여년 전의 일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법치를 추구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반인륜적 범죄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을 원용하든 이를 보다 강화하든 대책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그놈'이 이웃에 살고 있다는 불안감은 확실히 없애주는 게 근본 대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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