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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펜본부 이사 등 활발한 사회활동
12일 그가 살고 있는 중구의 한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그의 서재에서 3,000여권에 달하는 책들을 만날 수 있었다. 취재를 위해 연락했을 때 그는 "책이 많이 없다"고 했었다.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지금 소장한 책보다 더 많이 지인들에게 내주었으니 틀린 말은 아닌 듯 했다.

 그의 서재는 세 공간으로 나뉘어있었는데 하나는 집필실 겸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한 서재, 또 하나는 서재 바깥 베란다 쪽에 시집만 따로 보관하는 공간, 끝으로 아버지의 유품과 박 시인의 글이 수록된 책들을 보관하는 서고로 마련돼 있었다. 특히 이 마지막 공간에 있는 500권에 달하는 그의 글이 실린 책들과 마주하니 지난 그의 40여년의 문학인생이 이곳에 오롯이 담겨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집으로 이사올 때 북구 중앙도서관 등에 책을 기증하고 여러 문인들에게도 책을 몇권씩 줬지만 이상한 게 책을 덜어낸 뒤 몇 년이 지나면 다시 그 만큼의 책이 또 생기더라"며 "전국에서 새롭게 출간하는 시나 소설을 보내오는 것만 하루에 1~2권이 기본이니 책을 사지 않는다해도 일 년이면 약 500권의 새 책이 늘어난다"고 했다. 국제펜본부의 이사로 활동하는 등 전국적으로도 알려져 있는 문학가의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 박종해 시인의 서재는 지난 세월 그가 매일 밤 문학과 씨름해온 치열한 삶의 작업실이자 그를 더 넓은 문학의 세계로 인도해 준 동반자 같은 곳이다.


# 문인들과 교류 서신들 문학자료로 간직
그의 서재에서 눈길을 끈 것은 그가 지난 세월 문인들과 교류해며 주고 받은 서신들. 그는 이 편지들을 일일이 스크랩해서 가지고 있었는데 울산 지역 문인들 뿐 아니라 정비석 소설가 등 그와 교류를 맺어온 전국 각지의 작가들이 보내온 편지가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박 시인은 "요즘엔 대부분 사람들이 휴대폰 문자나 이메일을 쓰지만 7~80년대만 해도 사람들이 이렇게 직접 편지를 많이 썼어요. 그때는 한자를 혼용해서 쓰다보니 이렇게 한자가 군데군데 있는 것도 많고 시인들과 교류도 많아서 이렇게 시를 보내주거나 책을 보고 그 감상도 적어 보내기도 하고… 다 굉장히 소중하고 귀한 자료로 여기다보니 버리기가 아깝더라고요. 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거의 30년을 모아오다 보니 이제는 많은 자료가 되어 언젠가 한번 이 편지들을 단행본으로 묶어서 펴냈으면 하는 생각도 갖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 20년간 교직생활 은퇴 후 지역문화발전 앞장

 

   
▲ 아버지 故박용진 선생의 사진과 그가 쓴 글씨를 소개하는 박 시인.


그는 유학자 아버지의 영향아래 어릴적부터 남들보다 글을 더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았다. 부친은 어린 그에게 소학, 사자소학 등을 읽히며 어떻게 말해야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익히게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어린 그를 두고 소학을 통해 어떻게 하면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며 사는 삶을 살수있을지를 생각하게 한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학이 아닌 영문학으로 대학에 입학하며 이후 영문학, 한국문학을 주로 연구하거나 가르치며 살아왔다. 그는 "아마 어릴적부터 유학자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작용해 그런 선택을 내린것 같다"며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걸었어야 했는데"라며 웃었다. 울산 북구 송정동이 고향인 그는 64년 성균관대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2년간 객지를 떠돌며 일을 하다가 강원도 광산에서 또 1년간 관리일을 하게 됐다. 어릴때부터 문풍이 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큰 고생이 없이 자랐던 그의 포실한 삶에서 이 때 보게 된 광산의 노동자들은 그에게는 또다른 세상의 모습들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는 아무리 독서가 좋지만 실제 경험을 따라갈 수는 없다며 문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역시 그런 실제 경험의 힘이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문학 잘할려면 실생활 경험 중요
체험 못하면 독서로 간접경험을


 이후 창녕 옥야중학교에서 처음 영어교사로 부임한 뒤 67년부터 울산중에서 20여년간 교편을 잡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틈나는 대로 시를 쓴 것이 계기가 돼 1968년 문인협회에 가입했고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대구에서 교감, 교장을 생활을 거치며 퇴직하고 2004년 다시 울산 고향에 내려와 울산예총 회장, 처용추진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북구문화원장 등 다양한 자리에서 지역 문화예술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 "젊은 이들 고전 통해 삶의 지혜 얻길"
서재를 둘러본 뒤 얘기를 나누는데 시인은 갑자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문학은 체험이다'고 했어요"라며 말을 꺼냈다. 그리고는 "근데 우리가 살면서 모든 걸 다 체험할 수는 없잖아요? 사람을 죽이는 것도, 총을 쏠 수도 없고, 뭘 훔치는 것도 그렇고 말이죠. 그럴때 그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독서이자 또 상상력을 통한 문학이죠. 그래서 독서는 문학을 잘하기 위해서 당연히 필요한 것이고, 책을 많이 읽다보면 간접경험이 많아지ㄱ, 내 삶은 물론 다른 누군가의 삶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독서의 이유에 대한 명쾌한 답이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몇 장 읽기도 전에 눈이 시큰해진다는 그는 아마도 젊은 시절 읽었던 책들이 자신의 문학인생을 버티게 해 준 큰 힘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정확히 그 책들의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청년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책들은 주로 문학고전이 많았다.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 조셉 콘레드의 <어둠의 속>, 펄벅의 <대지>, 도스토프예스키의 <죄와벌> 등을 들었다.

 최근 젊은 이들이 문학고전을 멀리하는게 아쉽다는 그는 "읽기는 좀 어려울지 몰라도 읽다보면 재미도 있고 배우는 지혜가 큰만큼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한다"고 했다. 또 요즘처럼 등단이 쉬워진 상황에서 문학인들은 작품으로 승부를 보기 보단 이름을 알려지는데 더욱 급급한 듯하다며 진정한 문학가라면 다독, 다상, 다작에 힘써야하는데 그런 점이 아쉽다고 했다. 이렇게 요즘 문단에 쓴 소리를 뱉어낼 수 있는 어른과 마주하며 듣는 책 얘기는 오랜 시간동안 켭켭이 쌓인 그의 서재 속 양서들처럼 깊은 여운을 남겼다.

 [박종해 시인이 꼽은 내 인생의 책]

"문학적 상상력과 시적 영감의 조화에 충격"

# 어둠의 속 (조셉 콘레드著)

   
▲ 박 시인이 그간 문인들과 주고 받은 서신들을 보여주고 있다.


나에게 이 책은 문학적 상상력과 시적 영감이 어쩌면 이렇게도 조화로울 수 있을지 신선한 충격을 준 작품이다.

 이 책은 어느 조용한 템스 강 하구에 정박한 유람 요트 넬리 호 갑판에 몇 사람이 앉아 이야기하는 것으로 막이 열린다. 그때 뱃사람임을 자부하는 영국인 말로 선장은 로마가 영국을 침략한 시기, 템스강도 지상에서 어둡고 야만스러운 지역이었다며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젊은 시절 말로는 숙모의 연줄과 배경 덕에 콩고강을 오르내리는 선장직을 얻는다. 당시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지였다. 말로는 자기가 담당할 일에 대해 알려고 브뤼셀 본사를 방문한다. 그 회사 직원 중 자신이 살아서 유럽으로 돌아올 것을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을 말로는 발견한다. 또한 그곳에서 콩고에서 원주민을 교육하며 동시에 많은 상아를 수집해 본사로 보내고 있다는 똑똑하고 유능한 커츠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되고 이 신비한 인물의 이야기에 말로는 매료된다.

 인간성을 상실한 서구 제국주의의 위선을 파헤친 걸작으로 평가되는 이 소설에서 특히 클로즈업되는 것은 바로 이 어둠의 속에서 산출되는 상아의 마력과 물욕에 팔려 영혼을 잃어버린 커츠란 인물이다. 콘래드는 말로가 그를 찾는 장면을 치밀하게 배열한 상징적으로 예리하게 묘사한다. 시대를 앞지른 문제의식, 주제에 어울리는 이미지, 짜임새 있는 구성, 시적인 문제로 콘레드의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서구인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게 되는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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