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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온 고을사람들이 모두 참여해서 땅이 꺼질만큼 떠들썩하게 즐기던 놀이가 있었다.
 바로 마두희(馬頭戱)이다. 영조본 학성지(鶴城誌)에 울산의 풍속이라 하여 마두희가 기록 되어 있다. 마두희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행해진 민속놀이인 삭전(索戰), 즉 줄다리기의 일종이다. 울산에도 줄다리기 형식인 전통적 놀이문화가 있었는데 바로 마두희이다. 마두희란 명칭은 울산에서만 불려온 특유의 명칭이다. 삭전을 '마두희'라고한 이유는 풍수지리에 연관된 것으로 동대산이 말머리(馬頭)와 흡사해서 이 말머리가 고을쪽을 보지 않고 바다를 향해 뛰어드는듯 하기에 고을의 흉조라 해서 동해쪽인 동쪽을 향한 말머리를 줄다리기 형식을 빌어 고을 서쪽으로 끌어당겨 길하게 하려는 의식이 바탕이된 민속놀이이다.

 마두희는 여타 지방처럼 단순히 흉풍(凶豊)을 점치며 승부적 놀이를 하는 행사가 아닌 고을의 근원적 우려를 풀고자한 민의가 잠재된 민속화된 범 고을민의 축제였다. 따라서 울산의 마두희는 축제의 분위기에 성스러운 의식이 어우러지는 전래의 행사였다.
 언제부터인가 여기에 이긴편이 관가에서 부과하는 부역을 면하는 특혜를 주는 관행이 따르자, 고을민 전체가 안간힘을 다해 참여의식을 고조 시켰다. 학성지에는 단오절에 시행 했다고하나 후에 정월대보름에 관행처럼 행해졌다.

 정월대보름의 16일 밤이 되면(학성지에는 단오에 행해졌으나 일제강점기 때는 정월대보름에 행했음) 양쪽 진영의 장정들이 줄을 메고 '줄어르기'를 신명나게 한다. 이 때 양편은 제각각 상대방을 야유, 기세 누르기를 하는데 서로가 목청을 돋우는 바람에 마두희판이 떠나갈 듯 했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마두희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장난끼 있는 사람들이 나와 몸짓으로 상대를 비방하는 행위를 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상대를 비방하는 행위 외에 일제강점기 억압된 울분을 이 곳에서 빗대어 터뜨린 민족적 감정의 발로였다고 전한다. 여기에 구경꾼도 동참하여 울분을 발산하니 눈치챈 일제가 보고만 있을리 있겠는가. 일제는 민족혼 말살책으로 1930년대 중반 이후 집단적 놀이문화를 금지 시키에 이른다. 울산은 1936년 이후 마두희, 씨름등 수백년 이어 오던 전통적 민속놀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줄어르기가 끝나면 줄을 당기기위한 전초로 '줄걸기'가 시작 되는데 이 줄걸기가 몹시 힘들어서 소요시간이 5~6시간이 되었다. 이유는 줄을 걸 때 조금이라도 자기편으로 끌려는 줄꾼들의 움직임 때문이다.
 가까스로 줄이 걸리면 시작의 신호에 마두희의 줄다리기가 행해지는데 양진영의 패장들은 깃발을 흔들고 꽹가리, 북등을 치면서 힘을 돋운다. 줄을 쥔 사람들은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우여차','왜여차'를 외치며 힘을 발산한다. 심지어 부녀자들은 치마에 돌을 가뜩 담고 줄을 깔고 앉는 등 승부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이러한 마두희는 연 사흘간이나 계속 되었다니 그 규모와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끝내 판가름이 나면 이긴쪽은 줄을 메고 읍내를 누비며 함성을 지르면서 승리의 기쁨을 자축했다. 함성은 줄다리기의 희열 속에 일제탄압의 울분을 토하는 민족혼의 발로였다고 구술 증언자들은 전한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수백년 이어오는 토속의 혼을 표출하던 울산사람들의 정신이 베인 전통적 놀이였다.
 이것이 바로 가식없는 축제가 아닌가.  여기에는 이긴쪽도 진쪽도 없다 모두가 흥에 겨워 일상을 잊고 한마음이 된다. 양편으로 나누어 줄을 당길 때는 서로의 협동심을 발휘하고 줄다리기가 끝나면 함께 고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며 모두가 더나은 한해를 기대했다.

 마두희를 마치고는 부녀자들은 당긴 줄의 종줄을 끊어 집으로 가져갔다. 이 줄을 지붕에 던지면 곡식이 풍성하고 다산을 가져온다는 속설이 있었다. 한편 굵은줄은 태화진(太和津)의 사공이 운반하여 나루터의 배 묶는 줄로 이용했다고 한다. 줄이 뱃길을 순조롭게 하고 복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또한 마두희가 고을민들에게 얼마나 성스러운 의식적 행사였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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