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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암각화로 가는 길목의 대나무 숲길. 황토로 포장해 옛길의 정감을 준다.

태화강 100리 선사문화길 걷기대회가 열리는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와 두서면 천정리를 가로 지르는 대곡천은 '대곡천 암각화 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재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이곳에는 7,000여전부터 있어온 인류의 흔적인 반구대 암각화와 고대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천전리 각석 등 2개의 국보가 존재한다. 이들 암각화는 단단한 바위 위에 오랜 시간 걸쳐서 갉아내고 파내고 쪼아서 만든 삶의 기록이자 기원이다.

 
#반구대 입구 주차장에서 출발
'선사문화길 걷기대회'의 출발점은 반구대 입구 주차장이다. 울산-경주간 국도에서 벗어나 동편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반구대 암각화'문양으로 치장을 한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에서 대곡천으로 이르는 길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세계로 가는 듯 착각이 들 정도로 숲이 깊다.
 주차장에서 암각화박물관까지는 10여분  남짓 차도와 잇대어 난 산책로를 걸어야 한다. 아침 저녁 기온이 많이 떨어졌지만 산책길 양쪽 숲은 아직 여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산책로에 심어놓은 단풍나무 몇 그루가 서둘러 내 놓은 붉은 잎이 녹색 세상에서 도드라진다. 산책로변 개울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는 곳곳에 갖가지  퀴즈판이 설치되어 있어 문제를 풀다보면 어느새 암각화박물관에 이른다.


#암각화 박물관, 집청정, 반구서원
암각화 박물관은 반구대암각화를 비롯, 우리나라와 세계 각국의 암각화 모형과 산사시대의 생활상들을 잘 정리해 놓았다. 특히 1년의 절반이상이 물속에 잠겨 쉽게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반구대 암각화를 선명하게 복원해 놓아, 아이들 학습에 좋을 듯 하다. 하지만 걷기는 암각화박물관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대곡천을 건너 반구대 암각화 가는 길 향한다.
 반구대 암각화 가는 길은 멋스러운 옛 시골 마을 길이다. 대곡천이 흐르는 굽이를 돌아 휘감기듯 빽빽한 직립암석의 그늘이 우선 압권이다. 풍경이 시야를 가리면 푸름을 모아 정자에 올려놓은 집청전이 기다린다. 경주최씨 가문의 문중정각인 이곳은 고래를 만나기전 한번은 배낭을 풀고 걸터앉아 볼만한 곳이다. 맑은 기운을 모아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집청전(集淸殿)에 앉으면 맞은 편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반구대암각화를 비롯, 우리나라와 세계 각국의 암각화 모형과 산사시대의 생활상들을 잘 정리해 놓은 암각화 박물관.

  자세히 살펴보면, 두 마리의 학과 학소대(鶴巢臺)라는 글자를 발견할 수 있다. 두 마리의 학은 양각으로 학소대는 음각으로 차분하다.
 오른편의 학은 고개를 들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왼편의 학은 한 다리로 서서 리로 깃을 고르는 듯한 자세인데 놀랍게도 그 각인된 조각이 눈을 뜨면 현실로 나타나는 우연을 만날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집청전에서 숨을 고르고 한발, 반구서원이 쇠사슬에 잠긴 채 서 있다. 반구서원. 쇠붙이로 채워놓은 이곳은 포은 정몽주, 이언적, 정구 등 세분 선생의 높고 곧은 뜻을 이어받기 위해 조선 숙종 때 이 곳 유생들이 세웠으나 곧 불타 없어졌다 중건되고 다시 현대에 와 지난 1967년 사연댐 건설로 현재의 위치에 섰다.
 이곳은 포은이 언양현 어음리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자주 찾았고 문원공 이언적, 문목공 정구 선생도 두루 돌아다니면서 승경을 즐기던 자리이기도 하다.


#반구서원 지나 암각화 길
반구서원의 흙 담을 돌아 작은 언덕을 하나 넘어 암각화 가는 길로 접어든다. 데크로 만든 다리와 대숲, 공룡발자국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황토로 포장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한층 넓어진 대곡천이 흐르고, 왼쪽으로 소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져 상쾌하다.
 그 길 끝에 불현듯 환하게 열리면서 사연호 상류가 나타난다. 건너갈 수 없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능선하나가 버티고 섰다.  반구대 암각화가 위치한 곳이다. 
 

   
경주최씨 가문의 문중정각인 집청정.

 하지만 지금 반구대 암각화를 직접 볼 수는 없다. 정부와 지자체가 보존에 대한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는 바람에 올 여름 큰 비에 또다시 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제 역할을 잃은 망원경 옆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며 물 속 그림들을 상상해야 한다.
 반구대암석에 새겨진 그림은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를 알리는 증거다. 북방에 뿌리를 둔 선사인은 이 땅에서 수렵을 시작했고 이를 통해 삶의 질을 높여갔다. 보다 나은 먹거리와 보다 많은 종족에의 염원을 바위에 새기고 제단을 차려 발복을 노래했다.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남아 있는 반구대암각화는 무엇보다 고래가 주인공이다. 작살 맞은 고래부터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이 영락없는 고래천국을 연상케 한다.
 

 반구대암각화를 통해 유추해 보면 선사시대 울산은 그야말로 고래마을이었다. 반구대 인근의 넓은 평지는 고래잡이 배들이 정박한 고래항구였고, 그 상부 평원과 산지는 풍성한 먹을거리를 자산으로 풍요로운 문화를 향유하는 부족이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이들은 참고래부터 귀신고래까지 단체수렵을 통해 사냥을 해 뼈는 화살촉과 사냥기구의 재료로 사용하고 기름은 불로, 고기는 양식으로 활용했다.
 바로 이 같은 이 땅의 흔적이 사라질 위기에 있다. 퇴적암의 특성상 반구대암각화는 물과 상극이다. 퇴적암이 물을 만나면 자연 상태의 퇴적암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훼손이 급격하게 진행된다. 현재 상태가 풍화퇴적 4.5단계라니 거의 흙으로 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천전리각석으로 향한다.


#산 길 끝에서 만나는 천전리각석

천전리각석이 자리 잡은 곳은 석가산 동쪽 가장 돌출된 부분이다. 암각화박물관에서 대곡천을 따라 오솔길을 20분가량 걸어야 한다. 사연댐 제방에 막힌 물을 정확히 박물관 앞 다리까지 채웠다. 이 때문에 반구대암각화 가는 길 대곡천은 호수나 다름없다. 당연히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박물관에서 천전리 각석으로 가는 길에서는 계곡의 세찬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파른 산길을 가다보면 까마득한 발아래 사각에 가까운 바위가 들어온다. 천전리 각석이다.
 

 천전리 각석은 앞쪽으로 대곡천이 휘감아 흐르고, 대곡천 건너 쪽은 꼭 맞춤의 모양으로 함몰돼있다. 이 돌출이 사람들로 하여금 남성의 상징성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이곳에 여성의 가장 중요한 부위를 묘사하면서 염원했다. 선사인들이 새긴 문양은 오랜 시간에 걸쳐 구상에서 추상으로 건너왔다. 동심원에서 긴 타원형으로, 그리고 사각형으로 바뀌었지만 다산과 풍요의 기원은 여전했을 것이다.
 남성의 상징성에 여성의 상징을 그려낸 그림 사이로, 이 일대가 신라 귀족들의 나들이나,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소로 이용되면서 글귀들이 더해졌다. 그들의 간절한 염원 때문인지 수 천 년 전의 그림은 여전히 체온이 따뜻했다.
 

 천전리 각석은 동국대 박물관조사단이 1970년 12월 5일 인근 반고사지를 조사하다가 주민들의 제보를 받고 찾아가 확인한 산물이었다. 후일 이 일이 알려지면서 그 이듬해인 1971년 12월 25일 학술조사를 나온 조사단에게 제보해 발견된 것이 반구대 암각화였다. 딱 일 년 간격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 두 곳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두동, 삼동 등 수몰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대곡박물관. 옆 마당에는 삼동 하잠리 유적과 당시의 도로 일부도 복원, 전시해 놓았다.


#대곡박물관 도착
천전리 각석을 나와 대곡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숲은 있지만 머리위로 그늘을 드리우지 못한다. 길은 시멘트로 가지런하게 포장돼 10분 남짓이면 대곡박물관에 도착한다. 대곡박물관은 댐을 만들면서 두동, 삼동 등 수몰지역의 문화재 발굴결과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2009년 지었다.
 박물관은 작고 아담해 정겹다. 옆 마당에는 삼동 하잠리 유적과 당시의 도로 일부도 복원, 전시해 놓았다.
 7km 남짓의 선사문화길이 이렇게 끝이 났다. 세계적인 암각화 유산과 대곡천 주변의 빼어난 풍광이 눈에 아른 거린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문화유산을 가진 것에 대한 자긍심도 생긴다. 하지만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돌아오는 걸음이 무거웠다. 글=강정원기자 m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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