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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길 시인의 서재는 그가 일상을 보내는 곳이자 지나온 그의 학문적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공간이다. 문학을 전공한 이답게 문학책이 주로 눈에 띄고 그 외에 철학, 역사학 등의 인문학 서적이 다양한데 30년의 세월동안 찬찬히 모아진 책들이다보니 모두 주인장과의 각별한 인연을 자랑한다.


# 책탐 많은 시인·아내·자녀 책까지 수천여권 소장
안성길 시인의 집에는 그의 서재부터 아내 심말선(50)씨의 서고, 자녀들의 서고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수천여권 소장돼있다. 그중 가장 많은 책이 있는 곳은 안 시인의 서재공간으로, 그는 대학 시절 공부했던 책들까지 여전히 서가에 보관하고 있다.
 책이 너무 많아 최근에는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그는 "학생시절 공부를 못했던 열등감 때문인지 책욕심이 옛날부터 많다(웃음)"며 "아내는 늘 이렇게 쌓인 책들을 보며 버릴 건 좀 버리라고 하지만, 그래도 책이 주는 자양분만큼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어 책들을 못버리고 있다"고 했다.
 그가 이렇게 책을 소장하고 있는데는 사실 그만의 이유도 있다. 안 시인은 "사실 학교다닐 때는 공부에 큰 관심이 없다보니 잘하지는 못했고 주구장창 했던 것은 독서 뿐이었는데 독서를 하다보니 이렇게 학자가 됐고, 그 때문에 책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준 은인 같은 존재"라고 했다.
 

고2 때 김준태 시'감꽃'접하며 지적 감흥
이후 시집·문학서 탐독 읽는 즐거움 느껴
최근엔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답 얻어
시인에 독서는 삶의 방향 묻는 필수 절차


 시인은 또 최근 스마트한 디지털 콘텐츠가 발전하지만, 종이책의 장점을 따라올 수 없는 측면 역시 종이책을 선호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어연구를 하다보니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사전인데 사실 언어란 게 늘 변화하는 것이다보니 요즘엔 국립국어원의 인터넷 사전을 애용한다. 그렇지만 인터넷 사전은 확실히 단어의 용례가 훨씬 다양하고 앞 뒤의 단어를 함께 볼 수 있는 종이사전의 매력은 따라올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많은 콘텐츠가 디지털로 점점 넘어가지만, 아날로그격인 종이 책이 가진 장점이나 매력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 기계가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인간이 가진 고유한 영역이 있다는 점. 이것이 지금도 나를 책탐많은 사람으로 남게 만드는 이유"라고 말했다.
 

 

   
대학시절 그에게 지적 감흥을 준 책들과 요즘 시인이 읽고 있는 책.


# 지적 충격을 안겨준 한 권의 시집
안 시인은 그의 중고생시절, 그리고 대학시절까지의 독서를 여러 분야를 종횡무진 넘나들었던 '난독(亂讀)'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얘기를 듣다보니 고등학생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줄곧 이어진 그의 독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시였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김준태 시인의 시'감꽃'을 읽고 교과서 속 시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지적 감흥을 강하게 받은 시인은 이후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시집과 문학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안 시인은 "그 때는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턱대고 읽는 즐거움에 빠졌던 것 같은데 아마 당시 나는 나름의 청춘의 열을 그런 책들을 읽으며 발산했던 것 같다"고 했다. 특히 그렇게 자의적으로 이 책 저 책 찾아서 읽었던 그 시간들이 아마 그가 처음 문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와 문학을 만난 건 경남대 사범대 시절이었다. 국어교육과에 진학한 그는 어려운 형편 탓에 학비를 벌기 위해 뛰어든 현대중공업에서 인생에 남을 시집 한 권과 맞닥뜨린다. 함께 그곳에서 막일을 했던 한 노동자가 <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이란 시집을 주머니에 꽂고 틈나는 대로 읽는 모습이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
 "대학생인 나도 처음 본 책을 손톱에 검은 때가 한가득이었던 한 나이든 노동자분이 보고 있었던 건 한마디로 지적 충격"이었다는 그는 곧바로 서점에 가 그 책을 사보았다. 당시 젊은 시를 쓰는 동인들이 모여 낸 그 책은 신선한 지적 충격을 주기 충분했고 안 시인은 이후 눈에 띄는 대로 다양한 시집을 읽으며 당시의 현대문학을 접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접하게 된 책이 바로 5.18 광주항쟁의 실상과 세세한 과정까지 모두 다룬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란 책이었다. 이 책의 내용을 기록했던 소설가 황석영이 당시 감옥에 수감되기도 한 이 책은 당시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했던 책이었다고 했다. 이 책을 본 이후 시대정신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부채의식을 갖게 됐다는 시인은 이후 60년대 독재정권에 맞선 비판적 지성지인 <사상계>나 김지하 시인 등의 시를 탐독한다.
 그의 서재에서 역시 통일이나 북한과 관련된 소위 '빨간 류'의 책들을 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다고 특정 이념이나 당파를 지지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만 우리의 사회가 바르게 흘러가고 있는가는 학자로서 늘 고민해야 할 부분이며 당시는 그런 고민이 더욱 강할 수 밖에 없는 시대상황이었다고 강조했다.
 

# 캠퍼스 커플이었던 아내가 만들어준 수제 시집도 한켠에

   
안 시인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공간. 지난날을 회상하듯 한켠을 응시하고 있다.


뜻밖에 반가운 책들도 만날 수 있었는데, 바로 대학시절 캠퍼스 커플이기도 했던 그의 아내 심 씨가 안 시인에게 직접 만들어 선물한 시집들이었다.
 안 시인은 "사실 대학 때 우리 마누라는 1등을 했고 나는 학과 꼴찌였을 정도로 성적이 낮았다"며 웃었다. 현재 장학사로 일하는 심 씨가 직접 편집해서 만들고 사랑의 글귀를 남겨둔 이 수제 시집엔 요즘이면 보지 못할 그 시대의 낭만과 애틋한 정이 묻어 있었다.
 그동안 그의 독서인생에서는 책탐이나 부인 얘기 말고도 지금까지 단짝 친구인 정일근 시인의 얘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대학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안 시인은 정일근 시인과 늘 서로의 책을 빌려 읽었다고 했다. 하지만 안 시인은 "책을 빌리는 마음과 돌려줄 때의 마음은 다른 것인지, 지금도 정일근 시인의 책 중 많은 책이 이 서재에 꽂혀 있다"며 웃었다.
 

# "독서=행복한 삶 가져다주는 처방약"
그렇게 얘기를 이어가던 중 시인은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할까'란 질문에 이제야 자신도 정리가 된다며 얘기를 꺼냈다. 그는 요즘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절박한게 참 없는 것 같다"고 말을 꺼냈다. 그는 "가령 수십년전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했지만 지금은 풍요로워진 시대에 살다보니 절박한 게 없이 자본주의 사회가 늘어놓는 소비문화에만 빠져드는 모습인데 그렇게 외양과 뱃속 배부름만 채우면 돼지새끼의 삶이나 인간의 삶이나 뭐가 다를게 있겠느냐"며 다소 격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살아야 할 절박함은 곧 왜 사는지라는 질문과 직결되는데 이 질문을 던지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란 답이 곧 나온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에 대한 답은 늘 내면에 질문을 해야하는 문제가 되고 그럴 때 책을 읽음으로써 생긴 사유의 힘과 간접체험들은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결국 시인은 독서의 이유를 "고민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에서 찾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에게 독서란 진정한 삶의 방향성을 묻는 필수절차인 셈이다.
 스마트한 디지털 기계가 어느 덧 삶에 깊숙히 침투하고 소비문화가 문화상을 대변하는 요즘의 한국사회에 시인이 간결하게 정의한 독서를 통한 치유법에는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찾기위해 나아가야 할 간단한 해법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글·사진=김주영기자 usk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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