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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눈을 만났다. 백설이 뒤덮인 산하가 뿌옇게 변하는 순간, 고속철도의 속도는 멈춰버린 듯 슬로비디오처럼 풍경이 미끄러졌다. 대전을 지날 무렵이었다. 대통령 선거의 막바지 지점,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2030과 5060의 세대가 갈린 세상의 완충지대에 눈발이 휘날렸다. 문자가 왔다. 47.6대 48.5 골든크로스를 찍었다는 소식이었다. 깜깜이 선거 기간 동안 보도되지 않는 여론조사 결과가 무수히 전해졌다. 페이스 북이나 카카오 톡을 닫아 버린 지 오래여서 포털 사이트를 통해 듣는 소식이지만 인터넷과 SNS 공간에서 벌어지는 여론전은 거의 진보진영의 일방적인 승리라는 느낌이었다. 침묵하는 다수의 보수우파 마저 문명의 이기를 손에 쥐고 여론전에 나선다면 이 땅은 선거 때마다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 되지 싶었다.

 헌정 사상 첫 여성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는 질곡의 삶을 살아온 산업화 세대의 상징이다. 그래서 박 당선인의 승리를 두고 산업화 세대의 결집이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에다 안철수와 이정희 등이 보수 세력의 대오 이탈을 완전히 차단하면서 혹한을 뚫고 투표장에 줄을  서게 하는 기현상을 만들었다. 역설적이지만 안철수의 어정쩡한 목도리 이벤트나 이정희의 '좌파본색'은 잠자던 보수우파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 됐다. 아랫목에 엉덩이를 깔고 세상에 냉소를 보내던 50대가 열에 아홉은 패딩점퍼 하나 걸치고 줄을 섰다. 유권자의 40%에 이르는 50대 이상 장년층은 평소 인터넷 댓글이나 SNS 활용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인터넷 포털, 트위터 등에선 으레 2030의 의견이 주류를 이뤘고, 마치 이들의 글과 사진이 세상의 전부인 냥 치부되기도 한다.

 문제는 자극이었다. 안방 아랫목이나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을 장년들이 TV 화면을 통해 만난 세상은 혼란이었다. 이정희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깜깜이 선거가 계속된 시간, 느닷없이 터져 나온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은 상식을 벗어난 야바위 수준이었다. 서울에서 점심을 같이할 모 방송사 보도부장 친구놈이 천안을 지날 때쯤 전화를 했다. "국정원 사건 말이다. 국정원 안에서도 난리다. 댓글로 여론조작을 했다면서 댓글 하나 프린터 해 제출 못하는 의혹이 어디 있냐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말이다. 문제는 사실관계가 아니라 이 시점에 왜 규명되기 어려운 의혹이 터져 나왔냐는 점이다. 그것도 문 열고 나오려는 자를 문 닫고 막아 시간 끌기까지 하며 공중파와 케이블에 생중계를 연출한 장면은 '기획'이라는 의혹마저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바로 그 장면에서 지켜만 보던 50대 이상의 보수우파는 '김대업'을 연상했을지 모른다. 불과 10년 전 당했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 투표소에 몰려나와 박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노무현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나.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노무현의 집권은 김대업의 무동을 타고 이뤄졌다.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의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인 민주당 설훈 의원은 군수사관 김대업을 앞세워 이회창의 아들에 대한 병역비리를 제기했다. 양심적 내무고발자로 둔갑한 김대업은 청와대 입구까지 걸어가던 이회창을 주저앉혔다. 믿거나 말거나 '대쪽 판사' 이회창이 뒷돈으로 아들을 군에 보내지 않았다는 의혹은 A급 태풍으로 한나라당을 날렸다. 뒤늦게 김대업 사건은 조직적인 '기획'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아뿔싸, 선거는 끝났고 노무현의 노란 목도리는 청와대를 휘감았다.

 눈발이 사그라지자 한강이 을씨년스럽게 시야에 잡혔다. 22일 동안의 난타전이 막을 내릴 무렵 한 해의 끝자리가 자리한다. 대선은 끝났고 네거티브와 흑색선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헌정 사상 첫 과반 대통령, 부녀대통령이라는 진기록이 보도되고 파란만장한 박근혜의 일대기가 지면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남북이 갈리고 좌우가 맞선 시대에 우리는 그를 원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에게 기대하는 높이가 있기에 50대들이 기꺼이 줄을 섰다. 원칙을 지키는 법치주의, 피아를 구분하고 상대를 다룰 줄 아는 절차주의, 가난과 고통을 아는 박애주의가 내공으로 녹아 있다고 믿기에 긴 줄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평소 박 당선자는 마가렛 대처를 벤치마킹 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웅변은 남에게 맡기고 나는 행동만을 하겠다"던 대처가 영국병을 고친 것은 원칙을 잃지 않았던 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집스럽게 원칙을 지켰지만 스스로 원칙의 노예가 되지 않았던 밀당의 고수가 대처였듯 그가 좌우로 남북으로 갈린 우리 사회의 불치병을 차근차근 하나씩 살피고 치유해 가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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