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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중구 성남동 옛 상업은행 맞은 편엔 아름다운 건물하나가 지나가는 행인의 눈길을 붙잡는다. 1989년 당시 리모델링한 이 건물은 옛 가로수다방이 있던 장소에 세워졌는데 세월이 흐르며 어느덧 울산의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그리고 그 건축물만큼 아름다운 향기를 지닌 곳이 바로 이 곳 건물 3층에 자리한 '목호문화공간'이다. 지난 23년간 지역 문화예술계와 동고동락하며 문화살롱을 방불케했던 이곳이 바로 오늘 소개할 소재. 최근 주인장 김종수(77)대표가 제2의 부흥기를 꿈꾸는 이곳은, 지난 세월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발걸음이 거쳐간 곳이자 울산 문화계의 일익을 담당했던 한 노장의 삶의 궤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 목호문화공간은 한 때 문화살롱을 방불케 한 울산 지역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다. 이 곳에는 주인장 김종수 고문의 서재도 자리하고 있다. 문학, 미학,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 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이곳은 울산 문화계의 한 노장의 삶의 궤적이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곳이자 지난 울산 예술의 흐름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학창시절 그를 보듬어 준 스승처럼
20년 교직자로서 사람되는 교육 강조
희수의 고령에도 울산문화운동 헌신
이제는 젊은 예술가들 지역문화 이끌때

 
#23년간 울산의 문화공간
강추위가 몰아쳤던 지난 12일 찾은 김종수 대표의 서재. 그의 서재에 들어서면 여초 김응현 선생이 썼다는 '목호문화공간'이란 현판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이어 익숙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다양한 책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우선 왼편에 동서양을 막론한 미술서부터 마티스, 고흐, 고야 등 유명 서양화가들의 화집, 미학서가 빼곡하다. 점차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면 문학서, 철학서 등 인문학 서적이 연이어 진다. 또 젊은 시절 그의 사진부터 엔틱풍의 손떼묻은 스피커, 조명 등 다양한 물건을 구경하며 얻는 재미는 이 서재를 구경하는데 따라오는 덤이다.

 

   
▲ 목호를 자주 이용한 울산문인협회 회원들과 야간대 학생들이 그에게 준 감사패.


 약 23년전. 당시 울산은 문화공간이 절대 부족했다. 목호는 그때 당시 미술전시, 음악이나 영화감상, 시낭송, 회의장 등 각 문화단체가 요긴하게 사용하는 공동의 장소가 되었음은 물론, 냉난방, 전시비용 등 일체가 모두 무료라 시민들이 문화활동을 하는데 있어 불편함이 없던 곳이었다. 김 대표는 그 중 매년 열린 야간대학생들의 작품전과 울산생명의전화 봉사자 교육장 임대가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했다. 이런 활동탓인지 그의 서재에는 당시 문인들이나 학생들이 그에게 준 감사패들이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 '책만 보는 바보' 되선 안 돼
대학시절 음악과 국문학을 전공한 이답게 서재에는 특히 이 분야와 관련한 책이 많았다. 특히 그가 부산 보수동 헌책방에서 산 책부터 50여년전 대학시절 공부한 책들이 많다보니 좀벌레가 먹고 이리저리 책장이 뜯어진 책들도 군데군데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월이 오랜 탓인지 "이중 한 권의 책을 꼽기란 참 어렵다"면서 "연못에 돌덩이를 던지면 그 파문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지만 어떤 모양으로든 그 영향은 연못에 남듯 이 책들도 분명 내 삶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책은 결국 지식의 원천으로 우리가 읽지 않으면 그 방대한 지식을 어떻게 다 얻을 수 있겠냐"며 "요즘은 방송프로그램이나 강연 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지만 원천적인 지식에 대한 경험은 책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 발로 뛰며 쌓은 넓은 인맥 중요
하지만 김 대표는 책 속 내용이 그의 인생에 방향을 제시해주고 자양분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책만 보는 바보가 되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삶을 돌아봤을 때 실제 삶에 영향을 준 것은 책보다도 직접 발로 뛰며 체득한 경험이자, 사람간의 네트워크"라고 말했는데 이 얘길 하며 그는 특히 사회에서 많은 스승을 만났다고 했다. 그 중 한 은인이 그의 고등학교시절 국어 스승. 그는 당시 갑자기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대학진학이 엄두가 나지 않아 학업에 손을 놓고 방황을 했는데 그 때 선생님이 자신을 많이 다독이고 잡아줘서 결국 사범대에 진학해 교편을 잡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스승과의 인연은 신기하게 오래도록 이어져 이후 그와 스승이 서로 어려울 때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사이가 됐다고. 그렇게 사회에서 만난 여러 스승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은 그는 받은 사랑만큼을 도로 제자나 주변 지인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교직시절 어려운 형편에 있는 제자들의 등록금을 대느라 총각시절에는 월급을 제대로 가져간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그는 "울산에 정착해 문화공간을 일군 것이나 피아노 사업을 했을 때, 심지어 뉴욕에 건너가 사업을 할 때도 실질적으로 가장 도움이 됐던 것은 그동안 쌓았던 넓은 인맥"이었던 것 같다며 "좋은 사람을 지척에 두는 것은 좋은 책을 손닿는 곳에 두는 것 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또 "요즘 많은 책을 읽고 교육받은 인재임에도 인성은 형편없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런 사람들이 성공하면 오히려 우리 사회에 더 큰 폐악이 된다"며 "무조건 공부만 시킬게 아니라 사람이 되는 교육에 힘써야 하는데 요즘엔 그게 부족한 듯해 씁쓸하다"고 했다.
 실제 20년간 교육자로 일하며 그가 가졌던 신념은 전문지식전달 보다 학생들의 인성교육이었다. 울산여고에 재직하던 시절 그는 매일 아침마다 담임을 맡은 학생들에게 조회시간 10분동안 명시, 명작소설, 실화, 생활예절 등을 읽어주곤 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제자들도 많다고 했는데 그는 아마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었을 때라며 웃으며 당시를 술회했다.
 
#"다음 세대 동화, 한국전쟁서 읽었으면"

   
▲ 수십년의 세월이 각 장마다 켜켜이 쌓인 국보도록 등 옛 책들. 책 사이에 1962년 4월 8일 날짜가 선명한 신문기사도 끼여 있다.


이런 우려탓인지 다른 책들을 제쳐놓고 김 대표가 추천한 책들은 동화와 한국전쟁 관련서들. 그는 이 책들을 '다음 세대가 무엇보다 꼭 읽었으면 하는 책들'이라며 꼽았다. 특히 동화를 추천하는 그의 목소리엔 이제 손주를 바랄 나이가 된 한 할아버지가 후세의 손자, 손녀들을 걱정해 하는 말인듯 진심이 묻어났다. 그는 "많은 동화가 주로 권선징악의 결말을 맺다보니 동화를 다독하면 정의로운 생각이 몸에 벤 의리를 아는 바른 사람으로 커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서를 추천한 데는 전후세대로서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 잘아는 그의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바로 윗 학년인 3학년 형들이 징집됐다. 요즘 젊은 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당시 전쟁의 피해와 영향은 컸다"며 "책을 통해서라도 지금 세대가 이런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후대에 이런 전처를 밟지 않게 된다"고 중요성을 역설했다.
 
# '남은 삶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고민
최근 그의 행보는 '문화도시울산포럼'의 고문 역할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단체의 창립준비위원장이기도 했던 그는 귀국후 얼마전에도 태화강문화관광벨트 심포지엄을 통해 원도심 문화지역 구상에 대한 그간의 얘기를 정리하고 새로운 얘기를 꺼냈다. 이 구상은 지난 1993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 그가 2006년부터 다시 울산에서 몇 달씩 보내며 다양한 문화예술계의 시민으로 이뤄진 단체 회원들과 논의하며 얻은 것들로 최근에는 행정이 힘을 실으면서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

 희수의 고령에도 울산의 문화운동에 쏟는 헌신적 열정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이것을 "그간 돌아본 세계 여러 도시와 울산을 대비시키며 느낀 안타까움의 발로"로 표현했다. 일흔의 중반을 넘어선 지금, 이제는 남은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지가 늘 고민이라는 그가 결국 마지막 숙제로 삼은 것이 '문화도시울산'의 조성인 셈이다.

 그렇게 지난 세월 현장에서 얻은 그의 산지식은 개관예정인 울산시립미술관과 문화관광도시 조성사업에 대한 다양한 의견표출로 이어졌다. 김 대표는 주로 신문지면의 칼럼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했는데 폭넓은 안목과 경험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다보니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살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뒤에 물러서 직접적인 행동은 젊은 친구들에게 맡기고 싶다는 김 대표. 그의 주변엔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많다. 그는 지난 세월 김 대표가 문화불모지 울산에 교향악단을 만드는 등 족적을 남겼듯 이들도 울산문화계를 이끄는 역할을 하길 바랬다.

 이렇게 그와의 만남은 책을 사이에 두고 몇시간째 이어진 얘기였음에도 결국 책을 넘어서는 인간과 삶의 가치들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는 시간이 됐다. 지난 세월 지역 문화계에 한 궤적을 남기며 살아온 그의 삶 자체가 책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 시간들이 아니라 삶과 정직하게 직면해온 시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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