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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효선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경주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스무 살 쯤 먹은 한 여인이 눈먼 어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끼니를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어느 해 흉악하고도 흉악한 흉년이 들어 구걸해 살기도 쉽지 않은 처지가 돼버렸습니다. 여인은 궁리 끝에 쌀 서른 가마니에 몸을 팔아 스스로 부잣집 종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쌀가마니들은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했었는데, 날이 저물면 한 움큼씩 쌀을 집어 와선 밥을 지어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그 어머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쌀겨나 쭉정이(糠粃)를 먹어도 마음이 편하더니 요즘엔 쌀밥만 먹는데도 창자를 찌르는 듯 마음이 편치 않구나. 어찌된 일이냐" 여인이 사실대로 고하니 그 어머니 대성통곡했습니다. 어머니의 구복(口腹)만 봉양했지 색난(色難)- 자식이 부모의 얼굴빛을 살펴 그 마음에 맞도록 봉양하기가 어렵다는 말- 은 못 살폈음을 탄식하던 그녀 역시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밤새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한때 저에게도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빤한 벌이에 애들은 장대처럼 자라 생활비는 배 이상 들어갔고, 거기에 선천적으로 사람 잘 믿는 성격 탓에 사기까지 당해 제법 큰돈을 탕진했을 무렵입니다. 대구 큰형 댁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저의 집에 몇 개월 머무시겠다고 오셨습니다. 그리곤 난생 처음 저의 집에서 생신을 맞이하시게 된 것입니다.
 해거름 녘, 모처럼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양복을 꺼내 입곤 중국집에서 만두 한 접시 사드리겠노라하곤 모시고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외식인지라 집사람과 애들도 싱글벙글했습니다. 하지만 마을의 비포장도로를 타박타박 잘 달려오던 차가 신작로를 만나자 갑자기 푸륵푸륵 절름발이처럼 절뚝거리더니 끝내는 멈춰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차 탓도 못할 주인의 처지였습니다. 10년도 더 된 중고차를 사서 해가 바뀌도록 주요부품도 제대로 갈아주질 않고 있었거든요. 다행이 기름이 없어 못 가는 것이었습니다. 고장 난 연료계기판을 믿고 가다가 덜컥 기름 탱크가 바닥이 나버린 걸 깜박했던 거지요.
 아무튼 가까운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플라스틱 병에다 담아 와선 꿀럭꿀럭 집어넣곤 식당까진 갈 수 있었습니다. 덜거덕 틀니를 끼우시며 따라나서시던 어머니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건만, 그땐 정말 속이 불편하셨던지 납덩이를 혓바닥에 감추신 듯 무겁고도 하얀 얼굴을 짓고 계셨습니다.
 "비싸 보이는데…" 잡수시는 동안에도 불안한 기색을 감추질 못하셨습니다. 가까이 중국집에 간다 해놓곤 멀리 시내 일식집엘 왔기 때문입니다. 걱정 마시라고 매번 말씀 드려도 음식이 쉬 넘어가질 않는지 유난이 틀니를 오물거리셨습니다. 그날도 어머니께 얻어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엘 다녀오는 동안 접고접힌 쌈짓돈으로 계산을 하셨든 거지요. 차라리 돈으로 드릴 걸 했지만, 돈을 드렸더라도 그 돈은 바로 저를 위해 쓰였을 겁니다. 아들이 생일상을 차려드리겠다 하니 "생일상을 차릴 돈을 나에게 달라" 하시곤 음식은 사오시질 않으시고 위기에 처했을 때 사용하라고 권총 두 자루를 사 오셨던 김구선생님의 어머님 곽낙원여사처럼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수시로 말썽부리던 내 고물차가 눈에 밟히셨는지, 그날 밤 자식들이 준 용돈을 꼬깃꼬깃 모은, 근 200만 원이 든 통장을 슬그머니 내 바지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참으로 뼈저리게 색난을 느낄 수 있었던 날이었지요.

뽀드득 흰 눈을 밟으며 수퍼엘 왔어요 만 원짜리 한 장으로 뭘 살 수 있을까요 잇몸을 튼튼하게 한다는 치약이 이천 원, 충치를 예방한다는 껌 한 통이 사천 원, 심심해하실 줄 모르시던 당신께선 껌도 씹지 않으셨죠?
걱정마셔요 한국 돈 만원도 쓸 만해요 끈기 있을 돼지고기 반근과 수개월 앞뒤 닦을 수 있을 두루마리화장지 몇 덩일 사고도 멀리 산마루를 넘을 버스비가 남아요
자는 잠에 가시겠다 몰래 밥까지 버리셨죠? 하지만 고기를 드실 땐 즐거이 틀니를 끼우셨잖아요 이제 궁금해 하시던 그 시절 까만 봉질 흔들며 뽀드득 집으로 들면 유리 물잔 속 당신의 틀니, 예처럼 싱글거렸으면 좋겠어요
  - 졸시 '유리잔 속 틀니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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