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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열전 거도조
"신라왕 탈해이사금(57~80) 때에 거도(居道)라는 사람이 벼슬해 간이 되었다. 그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신라국경에 있어 심히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몰래 빼앗을 생각을 품었다. 그리하여 매년 한 번씩 많은 말들을 장토(張土)[경주시 감포로 추정]의 들판에 모아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재미있게 놀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마기(馬技)라 불렀다. 두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익숙히 보아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 생각하여 괴이치 않았다. 이에 갑작스레 전쟁을 일으켜 두나라를 멸망시켰다."


#고려사 지리지
"울주는 본래 굴아화촌으로 신라 파사왕 때 이곳을 빼앗아 현을 두었다. 경덕왕 때 이름을 하곡으로 고쳐 임관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경덕왕 때 우화현은 우풍현으로 율포현은 동진현으로 각각 고쳐져 모두 (울주에) 소속되었다. 태조 때 군 사람 박윤웅이 큰 공을 세워 하곡·동진·우풍현을 병합해 흥례부가 설치됐다. 뒤에 공화현으로 떨어졌다가 뒤에 다지 지울주사로 고쳐졌다. 혹은 말하기를 신라 말 학이 날아와 울었다고 하여 신학성(혹은 계변성·개지변·화성군이라 함)이라 한다. 별호는 학성이다. 속현이 둘이다."
 "현양현(현재 언양)은 본래 신라의 거지화현이다. 경덕왕 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양주의 영현이 됐다. 현종 9년 (울주에)내속되었다. 뒤에 언양으로 바뀌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달천철장
"철장이 군 북쪽 달천리에 있는데, 백동·철·수철·생철이 나며 생철 1만 2,500근을 나라에 공납했다." 울산은 당시 영남지방 철 생산량 가운데 가장 많은 철을 생산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 사람들은 무예를 숭상하고 장사를 좋아한다. 품성이 굳세어서 문풍을 일으켜 쉽게 교화할 수 있다"
 이처럼 울산은 무예가 강한 도시였음은 임진왜란 때 가장 잘 드러났다. 당시 임난 직후 이덕형이 상소문을 통해 "울산 사람들이 임난에 관한 공이 가장 크다"고 말했을 정도로 울산은 임난에 대한 공이 컸다.


#삼국유사에 나온 울산사찰
<삼국유사>에는 울산 불교문화에 관련한 내용이 많이 수록돼있다. <삼국유사>에는 울산의 동축사, 태화가, 압유사, 반고사, 영축사, 혁목암, 망해사 등 많은 사찰이 등장하는데 이를 보면 신라 불교에서 울산 지역이 차지하는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일일기 왜성 싸움
일본 승려 경염이 쓴 <조선일일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울산 왜성(도산)에서의 치열했던 싸움의 기록이 있다. 경염은 "울산 도산성에서 왜군은 추위와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밤에는 피가 섞인 물을 길어 목을 축이며 벽토를 끓여먹으며 버텼다"고 기록했다.


#망조당유사, 학성지

울산출신 임난 공신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1847년 편찬된 <망조당유사>에는 임난 공신 서인충(1554~1610)이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울산군수 김태허(1555~1620)를 도와 해전과 육전에서 활양한 기록이 있다.
 <학성지>에는 "본군 사람이 모두 왜적에게 붙지 않은 것은 그의 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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