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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심리학을 전공해야 하는 정신과 의사로서 꿈을 기록하는 일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 자기를  수련하는 방편으로서 꿈이 필요한 것인데 꿈은 나의 감정 그림이고 '일차적 의미'가 드러나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꿈들의 기록이 있지만 그중에 잊혀 지지 않는 선녀라고 이름 붙인 꿈속의 인물이 있는데 한번 나타나고는 더 이상 꿈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런 저런 연상과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이글도 그런 연유에서 써진 것이고 [선녀를 날려 보내지 않는 방법]이라는 시도 쓰게 되었다. "치사한 것이기는 하지만/ 내 선녀의 옷을 훔쳐 와야 한다."하고 시작하는 시인데 다 아시다시피 나무꾼과 선녀라는 동화는 선녀를 취하기 위해 나무꾼은 날개옷을 감추어야 하는 것이다.

 날개옷을 감춘다는 것은 남성의 계략이나 힘에 의해서 맺어지는 관계처럼 부도덕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인데 "천사는 아름답지만/ 그에 대한 시를 쓰는 일은 그렇지 않다"고 선녀의 옷을 훔치는 이유를 정당화 해보았다.

 영감으로서의 선녀는 쉽게 사라지는 것으로서 그것을 의식에 붙잡아 매려면 의식적인 노력과 결단이 필요한 것이어서 선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감상만 하고 있다가는 아무 결실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단이란 마치도 신에게서 불을 훔쳐온 프로메테우스처럼 무의식적 영감을 붙잡아 매기 위해서 자신이 쇠사슬로 묶여 있는 것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이런 시인의 시상 작곡가의 악상 같은 것이 아닌 황홀함을 가져다주는 것에는 로망스인 연애 감정이 있을 것이다. 남녀는 그런 신들린 감정 같은 것으로 서로를 묶을 수 있고 사실 그런 나이 때의 남녀가 만나는 것을 선남선녀의 만남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 나중에 그런 감흥을 다 잊어서 그렇지 한 때는 얼마나 가슴 뛰고 황홀했던가. 정일근 시인의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에는 쓰여 있다. "그 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이라고 온몸으로 그녀와 하나가 되었던 때의 '사랑의 주소'를 들려주는 것 같다.

 그렇게 남녀란 하나가 되는 쌍(雙)이며 부부일심동체라며 결혼까지 한다. 하지만 결코 부부란 일심동체가 아니다. 선녀 같은 상대방일수록 그의 날개옷은 훔쳐져야 하고 즉 동일시되지 않아야 하고  그리고는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내 마음 속에 보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냥 날개가 아니고 날개옷이다. 옷으로 상징되는 '문화적 변장'과 '현실적 적응'같은 것이 부부 생활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성의 가슴 속에 있는 여성을 아니마라고 하고 여성의 가슴속에 있는 남성을 아니무스라고 하는데 아니마는 감정으로 나타난다.

 남편은 이런 자신의 감정인 아니마와 이야기하는 방법을 익혀야한다. 이것이 익을 때 까지는 그 아니마의 현실적 전달자인 아내가 적어도 아이 셋을 낳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남성의 경우 자신의 감정이 마치 하나의 인물인 것처럼 자신의 감정에게 얘기를 걸어보는 것인데 예컨대 아내와 불화할 때 자신에게 일어나는 증오감 같은 것에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래 내가 어찌했으면 좋다는 거요?" "그렇게 미워하면 내 아내와 나는 어쩌란 거요?" 하는 식으로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 자신의 아니마와 예전에는 그것과 일치했던 현실의 아내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인지를 체험해본다.  

 어느 때는 아내가 꿈속의 선녀처럼 해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고 어느 때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해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현실의 아내가 충족시켜준다는 건가.

 물론 한때는 그랬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정말 아내가 아름답게 보였다. 그냥 앞에 있어 주기만 해도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그러지 않았나.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변했다. 상대방에다가 나의 기대를 덮어씌우고 있다는 것을 까먹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때의 그 선녀를 날려 보내지 않는 방법은 생각보다는 간단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일찍 아이를 셋을 낳기도 전에 날개옷을 내놓으며 상대방에게 따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날개옷은 말하자면 우리의 초심이다. 처음에 한 약속처럼 선녀와 사는데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일로서 곤궁하게 살더라도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는 허리띠를 풀지 않아야 하는 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진정 하늘에서 내려와 같이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선녀와 현실에 있는 대리인인 아내 둘 다  날려 보내지 않는 방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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