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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만 귀는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혀는 어떨까? 고향의 맛이니 엄마 손맛이니 하는 걸 보면 혀도 익숙하고 오래된 맛에 끌리는 게 아닌가 싶다.

 맛의 기억에서 가장 먼저 혀끝에 아련히 느껴지는 것은 어린 시절 친구네 집에서 먹었던 오징어탕이다. 내 고향은 대전인데, 대전은 내륙지방이라 해산물이 흔치 않은 편이다. 친구 어머니는 어디선가 생선을 가져와 이 곳 저 곳 팔러 다니셨는데, 가끔씩 팔리지 않아 남겨오는 생선이 있었다. 어느 해 겨울, 친구 집에 놀러가니 마침 남겨온 오징어가 있어서 그걸로 국인지 찌개인지를 끓여주신 것이다. 그때 오징어란 것을 처음 먹어보았고, 나는 그 쫄깃하고 구수한 식감에 입이 황홀해졌다. 맨 처음의 기억이란 강렬한 법이어서 나는 아직도 그보다 맛있는 오징어탕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겨울엔 혀끝의 미뢰가 특별히 활발하고 예민해지기라도 하는지, 맛에 관한 추억은 겨울에 많은 것 같다. 겨울은 뭐니 뭐니 해도 김장의 계절이다. 김장김치는 담장 그늘 아래 김칫독에 묻어두는데, 한겨울 새벽에 김치를 꺼내러 가는 일은 정말 싫었다. 밖은 아직 어두컴컴한데다가, 땅은 얼어붙어 울퉁불퉁 했고, 한기가 옆구리를 파고들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거기다 함박눈이라도 내릴라치면 목덜미에 선듯선듯 눈발이 닿고, 뚜껑을 열어놓은 김칫독 속으로도 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들어가곤 했다. 하지만 갓 꺼내온 배추김치는 시원하고 아삭하고 감칠맛이 났고, 눈 내리는 밤에 먹는 동치미국물은 특히 시원하고 달콤하기까지 했다. 언니들과 설설 끓는 아랫목에 앉아, 고구마를 한 솥 가득 삶아 놓고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와 함께 먹는 맛이라니! 그런 밤에는 눈이 내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사각사각 살얼음이 입 속에서 부서지는 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것이다.

 어머니가 끓여 주신 팥죽은 어떤가. 내가 유난히 팥죽을 좋아해서, 겨울이 되면 어머니는 손이 많이 가는 데도 불구하고 자주 팥죽을 끓여주셨다. 김이 서리는 뜨거운 팥죽도 좋지만 하룻밤 지나 차가워진 팥죽도 맛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팥죽은 식어야 제 맛이 난다며 일부러 부엌 문 옆에 두어 차게 해서 먹곤 했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친구들과 떠난 남도여행에서 먹었던 홍어무침도 기억난다. 잘 곳을 구하던 우리에게 마을 어르신은 결혼식으로 식구들 모두 서울로 가버린 이웃 친척 집에서 하룻밤 머무는 걸 허락하셨다, 우리는 김치라도 찾을 요량으로 부엌을 기웃거리다 혼인잔치에 쓰려고 마련해 둔 홍어무침을 발견하였다. 매콤달콤한, 그것도 몰래 꺼내 먹는 겨울철 홍어무침은 참으로 별미였고, 우리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잔칫집 홍어무침을 제법 축내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미안한 마음에, 어리등절해하는 어르신께 라면 한 상자를 사드리고 부리나케 그 집을 나왔던 것이다.

 얼큰하고 구수하고 달짝지근한, 이 모든 겨울의 맛은 이제 어디로 갔을까. 친구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동치미는 다른 음식들에 밀려 잘 담그지 않는다. 그리고 웃고 떠들던 친구들도 모두 소식이 끊겼다.

 한 겨울에도 포도나 수박을 먹을 수 있고, 분명 먹을 것은 풍요로워졌는데 혀의 한 끝이 허전할 때가 있다. 미각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이고 복합적인 감각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거나 '아이 목에 젖 넘어가는 소리' 같은 말이 아니라도 맛을 느끼는 데는 눈, 코, 귀 등 오감이 동원된다. 사실 코를 막고 음식을 먹으면 맛이 덜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음식을 맛본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 그것만이 아닌 그때의 분위기와 소리와, 정성과, 향취까지 맛보는 것이다. '맛'이란 것이 우리의 기억에 오래 각인되어 그리워하게 되는 것도 그때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과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그것은 구름 사이에 퍼져 나오는 햇살처럼 따스하게 우리의 혀끝에 머물러 우리를 아득한 기억의 창고로 데려가고, 거기서 만나는 옛 기억들은 현재의 팍팍함과 어려움을 견디는 힘이 되는 것이다. 고향의 맛과 엄마의 손맛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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