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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을 바라보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 요즘은 일부러 뒤편의 쪽문을 자주 연다. 사무실 앞뒤 풍경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앞에는 새로 지은 현대식 아파트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사무실 양옆으로는 크고 작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여느 도시의 아파트촌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사무실 뒤에는 붉은 벽돌집들이 즐비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파트의 기세등등한 위세에 눌린 주택들이다. 내가 이곳에 살기 시작할 때는 아파트가 한창 붐을 일으킬 때라 주택은 인기가 없어서 집값이 쌌다. 우리 사무실을 비롯해 좌우로 나란히 있는 길가 상점들도 원래는 주택이었는데 앞에 아파트가 들어서자 용도변경이 가능해져 상가로 조성이 되었다. 당연히 집값도 뛰었다. 복불복이지만 뒤에 있는 주택 사람들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몇 년 전에 구청에서 주택의 높은 담장을 허물고 집집마다 마당에 차(車)를 들일 수 있는 공사를 해 주었다. 주차공간이 부족해 시비가 잦았던 곳이라 시범마을로 공사를 해주니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이 동네는 옥동(玉洞)에서 '구슬마을'로 이름까지 바꾸며 새롭게 단장을 했다. 낮은 돌담에 앙증맞은 우편함이 세워지고 화단에는 계절 따라 갖가지 꽃들이 피어났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는 낮은 돌담이 있지만 골목 안의 마주보는 벽돌집들은 담장이 없다. 언제라도 불쑥 들어가면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반길 것 같다. 높고 견고한 담장을 허물자 사람들의 마음도 부드러워졌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도 함께 사라진 모양이다. 담을 허물기 전에는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철옹성에 갇혀 지내던 사람들이 담을 허물어 마주칠 일이 많아지자 미소를 짓게 되고 이집 저집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모여서 고기도 굽고 술잔도 기울였다. 벽이 사라진 공간에는 사람 사는 향기로 가득 채워졌다.

 그러나 유독 한 집이 담을 허물지 않고 있다. 높은 담벼락을 바라보니 갑갑하다. 예전에 모두가 그런 모습일 때는 아무렇지 않게 느꼈을 텐데 유난히 한 집만 그러하니 갸웃거리며 자꾸 쳐다보게 된다. 높은 담장 집의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아름답게 변신한 구슬마을의 옥에 티다.

 요즘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예민해서 혹여 자신이 손해 볼 것 같은 일에는 무척 방어적이다. 구청에서 공사를 시작할 무렵 벽돌집 사람들의 의견은 봄날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분분했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내 돈 들이지 않고 차를 마당에 들일 수 있는 공사를 해 준다고 하니 서둘러 담을 허물자고 했다. 주차 때문에 날마다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이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담을 없애버리면 치안이 문제가 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마다 들여다보는 게 싫다고 버텼다. 곡절 끝에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도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서로 먼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옥신각신했던 것이다. 잡음의 시간도 흘러가는 법이라 담장은 허물어지고 낮춰졌다.

 사방으로 아파트가 있는 곳에 낀 벽돌집들이 그때 마음을 열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했다면 지금처럼 개성을 살리며 마을의 격(格)을 높이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높은 담장에 뾰족한 침까지 박아 놓고 무뚝뚝하게 서 있는 집을 보면 왠지 삭막하고 갑갑해진다. 이곳이 원래는 키 낮은 담장 너머 오순도순 사는 곳이 아니었다는 듯,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 주려는지 곱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으니 바라보는 마음이 불편하다.

 벽 안과 벽 바깥은 단절되어 그 두께만큼 고립을 느끼게 한다. 고립된 곳에서는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 소통부재는 사람을 외롭게 한다. 넘지 못할 벽을 앞에 두고 산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사람도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면 사는 일에서 좀 더 너그러워지리라.
 대문 없는 마을에는 지나가던 바람도 쉬어가고, 마당에 핀 천사의 나팔이 웃으며 손짓을 하고, 나직한 돌담에는 햇빛이 굴러다니다 우편함을 기웃대기도 한다. 일상의 언저리에서 만나는 새로워진 마을의 풍경이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잖아도 외로운 세상살이, 부러 고립된 섬처럼 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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