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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맵차다. 새벽달이 이우는 하늘을 보며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 나온다. 어둠이 채 걷히기 전이라 동네는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데 부지런한 떡집만이 불을 밝히고 있다. 딸아이와 나는 잔뜩 움츠리며 종종걸음을 친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까지 둘렀지만 볼은 금세 얼어버릴 것 같다. 이 새벽에 모녀는 헬스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딸아이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객지 생활에 편리한 인스턴트 식품을 주식으로 먹은 탓인지 몸 전체가 부은 것처럼 군살이 둘러쌌다. 마른 체형은 아니지만 이렇게 살찐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시작된 새벽운동이었다.

 딸아이는 하품을 연신 해댄다. 야행성이라 매일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벽 때문에 새벽 찬바람 속을 걸으려니 아마 죽을 맛일 것이다. 난들 이 새벽에 일어나고 싶을까. 방학이라 함께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늦잠과 바꾸어선 안 될 일이었다. 헬스장이 집 가까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헬스장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새벽부터 달리고 있다. 우리 모녀도 달리기 시작한다. 움츠려들던 몸에 온기가 돌고 땀이 나기 시작한다. 삼십분을 달리고 자전거를 탈 때쯤이면 동살이 퍼지고 마주보이는 아파트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한 시간 삼십분여 동안 운동을 했지만 칼로리 소모는 별로 크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거의가 영양과잉 상태다. 맛난 음식들이 손닿는 데마다 널려 있고 달콤하고 기름진 음식에 길들여진 입맛은 골라서 먹기만 하면 된다. 입에 달면 몸에 해롭고 입에 쓰면 약이 된다는 옛말이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 시절에 먹었던 일상의 음식들이 지금은 애를 쓰며 돈까지 지불하며 먹으려는 '자연건강식'이 되었다. 맛있는 것만 먹고 편하게만 살려고 하니 세상은 '살과의 전쟁'을 한 판 치르고 있다.

 '배 꺼질라, 그만 뛰어라.'
 활동량이 왕성했던 어린 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곧잘 듣던 말이었다. 먹는 음식에 비해 활동량이 더 많았던 시절이라 부모님의 '그만 뛰어라, 배 꺼진다.'는 소릴 무척 많이 듣고 자랐다. 하루세끼를 먹이기도 빠듯한데 뛰어 놀다 금세 배고파하는 아이들이 어른들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곤궁하여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대였다.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그 시절에는 뚱뚱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거친 밥을 먹고 슴슴한 나물이나 김치, 된장국 등 주로 채식위주의 식생활이 오히려 건강을 지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기름진 음식은 명절에나 겨우 맛볼 수 있었다. 맛있다고 과일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뱃속은 늘 헛헛했지만 몸은 가벼웠다.

 풍족해서 좋은 것보다 약간 부족한 것이 오히려 탈이 없다. 부족한 듯 먹고 살았어도 지금처럼 무서운 병은 없었다. 건강을 지키고 군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식습관이나 식사량을 조절하지 못하면 가벼운 몸으로 살 수 없다. 문제는 길들여진 식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별의 별 수단을 동원하여 둘러붙은 잉여분의 살을 빼려고 난리법석이다. 우리 모녀도 그 대열에 끼여 있다.

 오죽하면 찬바람을 맞으며 운동을 하려고 작정을 했을까. 새벽마다 모녀는 시간과 돈을 들여 뛰러 간다. '뛰지 마라, 배 꺼질라.' 새벽달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풍족하고 편한 세상이 결코 좋은 세상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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