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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지명의 시원 우시산국 '우불산'

울산은 1413년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 때 '울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울산의 위상은 고려 당시의 지명이었던 '울주'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태종은 지방 행정개편 당시 주·부·군·현 중 '주'에 해당하는 고을에 천(川 36곳), 산(山 23곳)을 쓰도록 했다. 전주 경주 등이 '주'를 유지한 것을 고려하면 고을의 등급이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울산대 한삼건 교수는 당시 중앙정부의 지방 세력에 대한 경계 정책, 잦은 왜구의 출몰 등으로 형편없이 추락한 지역의 위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울산, 삼한시대 '우시산국'…'우'와'시' 합쳐진 '울'에 뫼'산'붙여
울주, 고려 1018년에 붙여진 명칭으로 웅상·웅촌 명산 '우불'서 이름따
웅상 용당리 우불산신사, 울산부사가 제 지내는 등 우시산국 흔적 간직


#울산, 고려시대까지 여러 지명 거쳐

'울주'는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붙여진 행정명칭이다. 울산지역은 고려시대 이전까지 동진(東津), 하곡(河曲), 우풍(虞風)등의 지명이 있었다. 고려가 건국할 때 이 지역 출신 박윤웅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흥례부(興禮府)로 불렸다. 흥례부는 동진, 하곡, 우풍 등 3개현을 합친 이름으로 '고려를 흥하게 했다'는 의미다.
 고려 현종 때 이 지역의 지명이 흥례부에서 울주로 바뀐 것도 중앙정부의 견제에서 비롯됐다는 추론이다. 우풍, 하곡, 동진 등 지역의 여러 지명 중 가장 변방에 해당되는 웅촌 웅상 일대의 우풍현에 있는 명산 '우불'에서 이름을 땄다는 것이다.
 '우불단'과 '울벌들'이란 장소가 남아있는 웅상과 인근의 웅촌 일대에는 삼한시대 때 '우시산국(宇尸山國)'이 있었다. 
 

   
우불신사는 신라시대부터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제의를 올린 24개 소사(小祀) 중의 하나로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관련기록이 전해진다. 지금의 신사는 지난 80년대말 고친 것이다. 사진=이창균기자 photo@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한시대 진한 땅에 우시산국과 거칠산국(居柒)의 두나라가 있었는데 신라 석탈해왕 때 거도(居道)라는 사람이 마숙의 전법을 써서 두 나라를 정복한 일이 있었다.
 이때 정복한 거칠산국은 지금의 동래이고, 우시산국은 치소(治所)를 웅촌면 검단리에 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시산국은 탈해왕 때 신라에 정복 된 후 '우화'라는 이름을 거쳐 경덕왕 때 '우풍'으로 불렸다.


#"우시산국, '울뫼나라''울산국'으로 해석 가능"
우시산(宇尸山)은 어조사 '우'와 죽음 '시', 뫼 '산'으로 이뤄졌다. 울산(주)의 '울'은 우시산의 우와 시(ㄹ 표기)가 합쳐져서 '울'이 되었다. '울'은 울타리를 뜻하는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 한 것이다.
 따라서 우시산국은 '산이 울타리처럼 둘러싼 나라'의 의미이다. 삼한시대 웅촌 웅상 일대에 지역에 터를 잡고 번성했던 '우시산국'이 이 의미에 가장 근접한다.
 한 교수는 "우시산국은 '울뫼나라''울산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시산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중의 하나가 양산시 웅상읍 용당리에 위치한 우불산(于佛山)이다. 우불산은 양산과 울산의 경계가 되는 용당마을을 가르는 소하천과 접한 양산쪽의 나즈막한 산이다.
 삼국사기에 우불산신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우불의 옛 명칭은 우화(于火)이며 24 소사(小祀) 중 하나로 신라시대부터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해마다 음력 이월에 제의를 올렸다고 한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특히 기우제의 효험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소사에 산악신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이 시대에도 국가에서 관리를 보내 제를 지내게 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태종실록'권1 태종 14년 8월 신유조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신라시대와 같이 우불산신제가 소사로 받들어졌고 국가에서 매년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하였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울산군 사묘조에 보면 우불산신사는 1623년(인조 1)에 세워졌으며, 1644년(인조 22)에 제사(齊舍) 세 칸을 세우고 임야 및 전답 5두락을 단의 재물로 하여 해마다 이월과 팔월 하정일(下丁日)에 울산부사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하였다고 전한다.


#웅상, 일제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산시 편입
하지만 우불산신사가 위치한 웅상은 지난 1906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양산시에 편입되었다.
 한 교수는 당시 일제는 역사나 문화적인 의미보다는 교통과 거리 등의 편의에 따라 행정 구역을 나눴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웅상은 양산으로, 웅하(웅촌)는 울산에 그대로 남았다.
 울산이라는 지명의 시원을 찾는 단초가 되는 우불산은 시 경계와 불과 700m가량 밖에 되질 않는 지척이다. 
 

   
우불신사 앞을 흐르는 회야강에서 바라본 모습. 수령을 알수 없는 고목이 신사를 떠받치고 있다. 

 취재를 위해 우불신사를 찾은 날 신사 앞을 지나는 회야강 하천 정비 공사가 한창이다. 최근 조성한 도로를 따라 600여 미터를 가니 '우불사' 이정표가 나온다. 100미터 가량 이어진 소나무길 끝에 아담한 절집이 나온다.
 법당을 청소하고 있는 비구니가 우불사는 옛날 신사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처소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우불신사는 절집과 맞닿아 있다. 안내를 한 스님 신사는 현재의 건물은 1918년에 중수된 것이며, 1974년과 80년대 말 고친 것이라 했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우불신사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옛 문헌에는 일 년에 두 차례 제를 지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일 년에 한차례 8월 이 지역 주민들 주관으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담장너머에는 돌을 쌓은 단 위에 맞배지붕을 한 한 칸짜리 건물이 다소곳이 서 있다. 입구 쪽 담장 곁의 제물들을 보관하기 위한 작은 가건물을 제외하면 여느 사당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신사가 마주보고 있는 정면을 살피기 위해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사의 영험함이 다된 탓일까 재선충 피해를 입은 소나무 무덤이 지천으로 깔렸다. 신사 앞으로는 회야강과 웅상 시가지가 한 눈에 보이고, 그 뒤로 대운산의 크고 작은 봉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깝다. 하지만 강을 정비하고 있는 포크레인의 굉음 탓인지 어떤 '기운'을 느끼기엔 부족해 보였다.
 한 교수는 "우불산의 위치가 중요한 것이지, 신사의 위치는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우불산, 우시산국의 중심"
그렇다면 우불산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한 교수는 "우불산은 웅촌과 웅상을 근거지로 고대국가의 형태를 이룬 우시산국의 중심 또는 가장 높은 곳의 지위를 가졌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우불산을 중심으로 동쪽과 남쪽엔 대운산이, 서쪽과 북쪽에는 천성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강을 중심으로 판단하면 우불산을 휘돌아 흐르는 회야강은 우시산국의 상류에 속한다. 그래서 이곳 지명은 웅상이고, 웅촌의 옛 지명은 웅하였다.
 

 한 교수는 "우연히 웅촌의 진산 격인 운암산과 검단리 유적, 양산 당촌마을, 우불산이 거의 일직선 상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서 "이는 일본 고대국가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나타나는데, 신사의 위치보다는 우불산 자체가 우시산국의 신성한 어떤 곳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우시산국이 신라에 편입된 이후 이곳이 신라의 소사(小祀)로 정해진 것으로 볼 때 우불산은 과거 '우시산국'을 수호하는 신이 사는 산이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우불신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소나무 길.

 우불신사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다 이곳에 이르러 단을 설치하고 기도하였다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 갑작스레 일어난 신기한 바람이 우불산 남쪽에 진을 친 왜병의 진을 급습하여 왜병 수 백 명을 죽였다고도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사람을 시켜 강제로 사당을 헐게 하였는데 한산인부 윤모씨가 앞장 서 기왓장을 뜯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뒤 일본헌병이 칼을 차고 말을 몰아 이곳을 지나다 죽었다고도 한다. 오랫동안 인근의 사람들에게 이곳은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고 지나가야 하는 영험을 가진 신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우불산 일대 우후죽순 개발로 몸살
사당 앞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오래된 표구나무(기목나무) 5~6그루가 마치 사당을 떠받치듯 자리해 있다.
 우불산 신사 앞에는 명주실 한 타래를 풀 만큼 깊은 소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동안 수차례의 하천공사 때문인지 설핏 보기에는 개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우불신사를 나선 후 둘러 본 우불산일대도 마찬가지였다.
 웅상 용당마을과 울산시 경계 주변에는 지금 수십 곳의 소규모 공장들이 우후죽순 들어서 있다. 우불산 자락은 물론 허리까지 공장의 모습이 보인다. 회야강으로 유입되는 소하천들의 하수처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우불산의 8부 능선에는 폐광산(납석)이 생채기처럼 박혀있다.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복구 작업을 해 놓았지만 울산이란 지명의 시원이 된 우불산의 현재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일제가 아무 생각 없이 그어놓은 경계 때문에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일까.
 지금도 웅상 지역에는 울산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학성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향수와 지역발전, 역사 회복, 회야강의 체계적 관리 등을 위해서라도 행정구역 개편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치권의 움직임이 필요해 보였다.
 울산 지명의 시원이 된 '우시산국'의 또 다른 흔적을 찾아 웅촌지역으로 옮기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강정원기자 m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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