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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공평하다. 사람 흔적은 사라지고 가슴에 새겨진 마을에도 봄은 온다. 처용암과 개운포만이 남아 천년이 넘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남구 황성동이다. 하얀 벚꽃이 휘날리는 찬란한 봄은 아니지만 소박하게 핀 노란 유채꽃이 처용암을 감쌌다.
병풍처럼 들어선 잿빛 공장에 터전을 빼앗긴 어촌마을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처용암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군가 '이 곳이 처용암이오'라고 말해주지 않고서는 이 곳이 울산의 기념물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마치 죄수가 감옥에 갇힌 것 처럼 처용암은 길게 늘어선 공단 속에서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황성동 마을은 의연히 제 모습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처용의 아량과 닮아보였다. 상실을 받아들이고 스산함이 익숙해진 이 마을은 아내를 잃고도 노여워하지 않은 처용의 마음가짐을 닮아가고 있었다.

국제무역항·횟집으로 번성했던 남구 황성동
지금은 천년전 이야기 처용암·개운포성만이
올해말까지 개운포 성곽보수 등 탐방로 정비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에는 처용암의 의연한 자태를 잘 내다볼 수 있도록 정자를 마련해 두었다.

#신라 헌강왕과 처용의 전설이 깃든 처용암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앞 해상에 있는 조그만 바위섬. 지상과 연결된 해변가에는 처용암의 의연한 자태를 잘 내다볼 수 있도록 정자가 마련돼 있었다. 선선한 바람도 불겠다 정자에 앉아 처용암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도무지 그 하나만을 바라 볼 수 없었다. 공단을 배경으로 둔 처용암의 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한 때 이곳에는 횟집이 성업을 이뤘다고 한다. 공업화에 따른 개발로 마을이 철거돼 쓸쓸한 포구로 변했다.
 이 곳에는 신라 헌강왕과 처용에 관한 설화가 전해진다.
 처용이 처음 나타났다는 처용암은 개운포의 전설 같은 흔적이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처용설화를 들여다 보면 신라 49대 헌강왕(재위:875~885)이 동해안의 개운포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잃어버렸다.
 이상하게 여긴 왕이 물으니 천문을 맡은 관리가 "이는 동해 용의 짓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한다"고 답했다. 왕은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라고 관리에게 명령하자 곧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이 때문에 이 곳을 '구름이 개인 포구'란 뜻의 개운포(開雲浦)라고 이름 지었다.
 동해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이 탄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행을 노래하면서 춤을 추었다. 용의 아들 하나가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왕을 보좌하였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한때 횟집이 성업을 이루던 세죽마을 인근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철거돼 쓸쓸한 포구로 변했다.

 헌강왕이 그를 붙잡기 위해 미인에게 장가들이고, 6두품 귀족이 오르는 벼슬도 수여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를 탐낸 역신(질병을 옮기는 귀신)이 사람으로 변하여 밤이면 몰래 데리고 잤다. 하루는 처용이 집에 돌아와서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다.
 이때 역신이 처용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당신의 아내를 탐내 범했는데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격하고 아름답게 여깁니다. 앞으로는 당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울산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

일연은 이런 까닭에 고려시대에도 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문에 그려 붙여서 나쁜 귀신을 쫓고 복을 맞아들인다고 기록했다.
 왕이 돌아온 후 영취산 동쪽에 좋은 자리를 잡아 망해사(望海寺) 또는 신방사(新房寺)라 부르는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은 약속대로 용을 위해 지은 것이다.
 처용이 바다에서 올라온 이 바위를 처용암이라 불렀다.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됐다.
 

   
장생포에서 황성동 처용암으로 들어서기 전 개운포성지를 먼저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지금 성곽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신라시대 최대 국제무역항 개운포

황성동에는 처용암과 같이 흔적만  남은 쇠락한 포구가 있다.
 신라시대 알아주던 국제무역항, 개운포다.
 장생포에서 황성동 처용암으로 들어서기 전 개운포성지를 먼저 발견할 수 있는데 아직 복구 작업이 완성되지 못했다.
 개운포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지리지인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 통일신라 때에 경주를 배후에 둔 산업의 중심지로서, 신라 최대의 국제무역항으로 나타난다.
 특히 아랍 상인들이 많이 와서 살던 당나라 양주로 가는 바닷길의 신라 측 출발지였으며 당시 신라와 교역하고 왕래하던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은 물론, 동서교역의 주역인 아랍인들도 이용하던 국제항이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골품에 따라 사용할 수 없는 고급 물품들의 목록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에머랄드, 알로에, 페르시아산 카펫 같은 서역제품이 들어 있다.
 

 개운포는 외황강의 하구이며 강과 바다가 만나는 포구로 자연입지가 좋아 조선시대에는 군사항, 수군기지로 각광을 받았다.
 왜구 침범이 잦아 조선말기 수군 해산 때까지 군인이 주둔했다. 개운포 성터 그 유적. 성터 둘레에는 도랑을 판 흔적이 있다. 해자의 흔적이다.
 울산시의 발굴조사 결과 개운포성은 해변 야산 골짜기를 감싸안고 쌓은 포곡식 성(둘레 1,270m)으로, 북문지, 동문지, 서문지 등이 확인됐다.
 성벽은 기단부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큰 돌덩이를 세워 구조적으로 안정되게 쌓았는데, 이 축조방법은 병영성과 언양읍성 등 울산지역 성에서만 찾아 볼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개운포성지가 말끔히 정비되고 있다. 울산시는 올해 말까지 성곽 보수사업을 완료하기로 했다.

#개운포성지, 조선전기 성곽 형태 고스란히
현재 국내 남아있는 성터들은 조선후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나 개운포성은 조선전기 성곽의 형태를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어 조선전기 수군성(水軍城)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울산시는 올해 말까지 개운포 성지 정비사업을 완료하기로 했다. 성곽을 보수하고 주변에 잔디를 심어 성곽일주 탐방로를 정비하는 게 이 사업의 목표다.
 

 이날 찾아갔을 때는 개운포임을 알려주는 깔끔한 안내판이 마련돼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아주머니와 강아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개운포 주변을 청소하는 것이 아주머니의 일이라고 했다. 인적없는 개운포를 돌보는 지킴이 역할인 것이다.
 개운포성에 대해 아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옅은 미소만 지었다. 자긍심으로 새겨진 역사를 거창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아주머니는 조용히 개운포성을 바라보며 "아직 동문지, 서문지 쪽은 흔적도 없어 알아보기 힘들지만 곧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착한 눈을 가진 강아지는 보란듯이 개운포성을 알리는 석비 옆에 앉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안내판으로 자리를 옮긴다. 사람이 낯선가보다.
 하지만 강아지는 이 곳이 제 고향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개운포성 주변을 걸었다. 이제 곧 이 자리를 지키는 아주머니와 강아지도 깔끔하게 정비된 개운포성 앞에서 웃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글·사진=김은혜기자 ryusori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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