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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산책을 즐깁니다. 수시로 태화강변 산책로를 따라서 이른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한두 시간 정도 걷다가 들어옵니다. 그러고 나면 몸은 한결 가볍고 마음은 소녀처럼 맑아지는 것에 참 기분이 좋습니다. 그것은 하얗게 피어오르는 새벽 물안개나 앙증맞은 노랑머리 유채꽃이며 평화롭게 노니는 오리들의 아침 나들이를 마음껏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저녁나절 산책길은 주로 운동하는 사람들로 부산합니다. 주변에 아파트단지가 많다 보니 어린아이부터 노약자까지, 그 연령대가 다양합니다. 그중에는 이제는 가정과 사회에서 할 일을 얼추 끝내가는 중년의 부부들이 대부분입니다. 한정된 시멘트 상자 안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이다 보니 이렇게라도 자연에 몸과 마음을 비비며 호흡을 늦출 수 있다는 것은 여간한 다행이 아닙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자갈밭이었던 태화강변을 미끈한 산책로로 만든 것은 참 잘된 일입니다.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다양합니다. 몸에 착 달라붙은 운동복을 입고 부지런히 달려가는 사람, 양손에다 자그마한 아령을 쥔 채, 귀에는 이어폰을 걸치고 연방 벙글거리는 젊은 여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저처럼 산책하듯이 걷는 이가 더 많습니다. 나름대로 보기가 다 괜찮습니다.

 산책이 운동은 그다지 되지 않습니다. 운동으로 치면 달리기만 한 것도 없겠지만, 거기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달리기는 경쟁의 연속으로 비유됩니다. 아무에게나 달리기나 빠른 걸음을 채근한다면 금방 지칠 수도 있습니다. 산책은 육체와 정신 운동을 병행합니다. 젊을 때는 젊음의 분발심을 위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명을 훌쩍 지나서까지 경쟁자로서의 삶을 우격다짐한다면 금방 피곤해서 지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제 몸은 달리기를 거부합니다.

 제가 이렇게 걷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걸음걸이와 인생을 비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은 마라톤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이 적합한가를 곰곰 생각해봅니다. 마라톤은 달리기이니까 곧 '인생은 달리는 것이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달리면서 어찌 사물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령 요즈음같이 볼거리가 많은 태화강변을 달리기로 지나쳐 버리면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노랗게 피어나는 유채꽃과 물 위를 노니는 오리들의 평화로운 나들이를 음미할 겨를 없이 어찌 스칠 수가 있겠습니까. 언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새벽 물안개는 또 어찌 하구요.

 온갖 꽃을 피워내는 봄날이나 잎이 수런거리는 무성한 여름철을 지나 선혈 하는 단풍의 임종을 가슴앓이로 보낸 후로 나목 위에 내려앉은 하얀 얼음 꽃이 전하는 말간 심성을 읽거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마다 펼치는 신의 붓놀림을 우리는 오감으로 온전히 음미하는 방법을 익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잔치에 내 이웃과 친구를 동반하고 산책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지 않습니까. '네가 달려가니 나도 달린다'라는 생각은 자신에게 가하는 가혹한 형벌입니다.

 나는 이제 달리기를 거부합니다. 젊을 때는 젊음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이가 들어가면서까지 달리기를 고집한다는 것은 피곤하고 지치기를 자청하는 일이어서 스스로 파괴되고 말 것이니까요.

 인생은 산책입니다. 달리지 말고 걸어야 합니다. 걷는다는 것은 쉰다는 것, 여유를 말합니다. 언제 물안개가 피었다가 사라지는지, 물오리는 어떤 재주로 평화롭게 노니는지, 요즈음 같은 봄날에는 어떤 꽃향기가 더 멀리 퍼지는가를 제대로 음미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여유는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

 길 건너 학교운동장에는 등나무 꽃이 한창 물구나무서기로 매달렸습니다.  내가 며칠 한눈을 팔고 있는 새 잔뜩 몸치장을 하고 기다린 모양입니다.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채로 긴 허리를 좌우로 흔들어 보이며 두 눈을 꼭 붙들어 놓습니다. 내일아침 산책길에 다시 만나자며 손가락을 거는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이는 모습이 참 귀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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