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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 원, 짜증이 절로 나는 정치판이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발언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가 본질은 덮은 채 말 싸움에 도청 논란까지 번지고 있다. 대화록의 자구 해석을 놓고 포기다, 아니다로 맞선 것은 불과 하루를 넘지 못했고 이제는 야당에서 정상회담 대화록 불법 입수를 제기하며 여당을 공격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여당은 야당이 여권 인사들을 불법으로 도청해 왔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야말로 뻘판싸움이 여의도를 분탕질하고 있다.

 본질이 실종된 막말 공방은 급기야 '반역의 대통령'과 '연산군'까지 거론됐다. 우리가 북한을 공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북한은 엄연히 우리와 함께 UN에 가입된 국가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실체를 부정할 수 없기에 언제나 남북 문제는 상대를 인정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게 대북관계의 출발점이었다.

    그렇다면 지난 2007년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김정일 면담은 고도의 외교적 행위로 보는 것이 맞다. 대통령의 정상외교는 흔히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표현한다. 그만큼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 행위들이 외교의 밑거름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대통령 기록물은 엄격한 보안과 관리를 담보해야 하고 비밀문서로 보관되는 부분에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그 고도의 정치적 행위를 두고 '나는 알고 있다'는 식의 소영웅주의가 지난 대선 때부터 우리 정치판에 나돌았다. 대통령의 외교적 행위가 증권가 찌라시처럼 도는 국가는 불행하다. 그래놓고 이제는 아예 까발려버리고 '반역의 대통령'이라고 손가락질 한다. 그래 맞는 말이다. 영토선을 괴뢰의 수괴 앞에서 흥정의 대상처럼 이야기한 것은 반역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노 전 대통령이 흥정의 대상으로 NLL을 지목한 이유다. 김정일과 마주 앉아 교류와 협력을 이야기 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참으로 순진하기 짝이없는 행동으로 보일지라도 노 전대통령의 심중은 큰 그림의 평화지대에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스스로 그린 큰 그림을 바닥에 깔고 김정일과 마주한 노 전 대통령이 NLL을 북한에 헌납한다거나 포기한다는 식의 해석은 그래서 억지스럽다.

 '반역의 대통령'이라는 새누리당 정우택 최고위원의 말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하기야 민주당 우원식 최고위원의 '연산군' 발언도 그런가 싶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두 최고위원의 금기를 깬 발언은 어쩌면 지극히 국어공부가 덜된 우리 정치인들의 얄팍한 인문지식 수준을 대변하고 있다.

    반역은 명백한 팩트가 필요하다. 공개된 대화록의 자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노 전대통령이 김정일에게 NLL을 헌납하겠다는 사실은 없다. 행간의 의미를 확장해서 보면 노 전 대통령의 발언중 문제가 되는 부분은 "국제법적 근거 등이 분명치 않은 것인데 현실로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대목이다. 분쟁의 소지를 둔 국제법적 모호함은 외교적 수사로 볼 수 있고 현실적인 강력한 힘은 오늘의 현실이다. 그 부분을 전제한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을 반역으로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민주당 우원식 최고위원의 발언은 더 가관이다. 그는 여권의 대화록 공개를 연산군 시절의 사초 강제열람에 비유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몰락 위기에 몰린 훈구파는 연산을 사주해 왕은 절대 볼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조의제문에 담긴 사초를 강제로 열람했다"면서 "그런데 똑같은 비극이 지금 대한민국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그럴까. 사초를 볼 수 없게 한 것은 현재의 권력이 과거의 권력을 단죄하는데 사초가 도구로 작용할 것을 우려한 안전장치일까. 아니다. 연산이 무오사화를 감행한 것은 임사홍의 간교한 계략에 휘말린 결과라기보다는 연산 자신의 왕권 강화에 임사홍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산을 사주했다는 것은 연산이 사주한 것이 팩트에 가깝다. 역사에 무지한 인사의 입이 어울리지 않는 비유법으로 확대 재생산된 셈이다. 사초를 열람했다는 사실 하나로 박 대통령을 연산에 비유하고 남재준 국정원장을 훈구파의 일원으로 묘사하는 것은 노 전 대통령을 반역 운운하는 것만큼 무지의 고백이라는 이야기다.

 일부에서는 이번 논란을 두고 본질은 NLL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본질은 NLL이 아니다. 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의 대화록은 이명박 정부 때부터 나돌았다. 좀 더 과장해서 보면 우리 정치판에 대통령 기록물은 더 이상 금기 영역이 아니다. 필요하면 꺼내 읽고 발췌본도 만들어 돌리는 수준이다. 햇빛으로 환했던 대북정책 10년이 만든 음지를 들여다 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금기를 어기면 또 다른 금기가 무너진다. 그래서 지금 우리 정치의 논란거리는 NLL이 아니라 대화록 공개가 갖는 불법성에 모아져야 한다. 도청과 막말, 삿대질이 본질을 뒤덮어버린 오늘은 어쩌면 좌파정권 10년이 만든 또 다른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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