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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다면 도서관 옆에 살았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 한가해진다면 늦은 아침을 먹고 도서관에 가서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거리거나 <죽기 전에 꼭 읽어야할 교양100선> 이런 책을 차례차례 읽어보고 싶다. 등나무 그늘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시를 읽고, 종이를 꺼내 김 훈처럼 연필을 눌러가며 글을 쓰고 싶다. 도서관에 자주 들락거리면 열람실이든 등나무 아래든 나만의 자리 같은 게 생길 테니까 내가 조금 늦더라도 그 자리는 나를 기다리며 비어있을 것이다. 의자가 불편해지면 아예 서고 사이에 앉아 책을 보다가 잠시 갈피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유리창의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속에 먼지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도서관이 책을 보존하고 대여하는 곳이라면 최초의 도서관은 최초의 책과 궤를 같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도서관은 동굴 벽이나 넓은 바위 면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기호를 읽고 해석하며 주석을 덧붙여 갔으리라. 반구대 암각화를 생각해보라. 거기엔 장구한 시간대의 정보가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우리는 시간의 주름 사이에 끼어있는 정보를 이마에 주름을 지어가며 골똘히 바라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물 형태의 도서관은 책이 바위 표면을 떠나 점토판이나, 양피지나, 목간이나, 파피루스처럼 이동과 보관이 가능해지면서부터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도서관의 시초는 보통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꼽는다. 70만권의 양피지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왠지 그 도서관에 들어갈 때는 옷깃을 여미고 경건하게 들어가 깊은 바다 속의 물고기처럼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를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책을 읽을 때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묵독을 하는 것을 죄악시 여겼다고 한다. 책읽기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독자와 저자와의 대화로 여겨졌고, 책이 희소하기 때문에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도서관은 지식이 거래되는 장터로서 꽤나 시끄러웠으리라.

 나에게 도서관 경험은 4학년 때 학급문고에서 시작된다. 벽에 4단 책꽂이를 붙여 놓고 계몽사판 세계명작 시리즈를 꽂아둔 곳이다. 나는 거기에서 코제트와 빨간 머리 앤과 소공녀, 소공자, 집 없는 소년 레미, 명견 레시, 작은아씨들, 피노키오, 엄지 공주 등을 만났다. 그들과 만나는 게 정말 재미있어서 아무도 없는 교실에 혼자 남아 어둠살이 밀려올 때까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운동장을 가로 질러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발밑의 긴 저녁 그림자처럼 성큼 커버린 느낌으로 무언가 뿌듯하고 가슴 벅찼다.

 도서관은 얼마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인가. 몇 해 전 인기를 끌었던 영화 '박물관은 살아있다'에서 밤이 되면 온갖 유물과 유품이 되살아나 소동을 벌이는 것처럼, 혹은 밤이 되면 살아나서 무도회를 연다는 장난감들처럼, 책 속의 등장인물들도 밤마다 살그머니 활자 사이를 빠져 나와 서가 사이를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파우스트 박사와 메피스토펠레스, 프랑켄슈타인과 늑대 인간, 데미안과 싱클레어, 네모 선장과 에이허브 선장, 셜록 홈즈와 괴도 뤼팡, 그리고 온갖 책 속의 나, 나, 나, 나, 나들. 그들은 짙은 장막 같은 표지를 들추고 빠져나와 토론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춤을 추고, 노래하며 초롱아귀의 머리에 달린 불빛처럼 어둠을 밝히며, 밤의 적요를 흔들고 있을지 모른다. 서가 사이에서 기다리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샤갈의 그림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고향집 위를 날아다니는 것처럼 그들의 손을 잡고 지식의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이제 전자책과 모바일 앱 등이 활성화 되면서 종이책의 운명은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도서관의 기능이나 형태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과 같이 종이 냄새가 가득한 도서관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으면 한다.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은 텁텁한 냄새가 나는 낡은 책과 잉크 냄새가 신선한 새 책들이 함께 서가에 가득한 도서관이.

 도서관, 그 곳은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들이 깊은 우물처럼 고여 있는 곳이다. 비밀과 음모, 사색과 관찰의 장소이며, 침묵과 소음,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나도 책과 함께 천천히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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