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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사건을 계기로 우리사회에 또다시 '빨갱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공중파는 물론 종편 체널들은 시사토크 시간마다 소위 전문가들을 불러 이 땅의 '빨갱이 감별법'에 대해 저마다의 기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빨갱이'들은 상당수가 진보라는 망토를 쓰고 평화와 민주를 명찰로 달고 다닌다고 이야기 한다. 특히 '빨갱이'들은 대체로 입만 열면 온갖 좋은 말만 골라서 하고, 사용하는 단어도 민주, 평화, 평등, 개혁, 통일, 진보, 민족, 해방, 자주를 자주 올린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상한 것은 '빨갱이'라 불리는 이들의 입에서는 결코 '자유'라는 단어가 튀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이 자유를 거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뼈 속까지 거부하는 미 제국주의가 자유를 깃발로 펄럭이기 때문이다. 

 흔히 좌파와 종북은 이야기하면서 '빨갱이'에 대한 이야기는 부담스러워 한다. 구시대 유물 같은 '빨갱이' 이미지와 수구보수 골통의 전유물 같은 단어의 이미지가 '빨갱이'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석기가 연루된 'RO(Revolution Organization)' 조직이나 그와 유사한 지하조직을 좌파나 종북 따위로 부르기에는 너무나 안일한 현실인식이라는 주장도 많다. 체제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전복을 기도하고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는 세력에게 우리는 너무나 관대하다. 정당이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이야기 하고,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는 이름으로 진보를 이야기 한다. 평화와 진보는 평등의 논리를 왜곡하고 급기야 분배정의가 복지사회의 직행표가 된다고 시민을 선동한다. 그 선동이 부패한 보수의 약점을 파고들어 국회에 진출했다. 국민의 혈세가 부패한 보수 정치인의 뒷주머니를 채우는 판에 진보의 이름으로 미제척결에 앞장서는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큰소리 친다.

 좀더 쉽게 이야기 해보자. 새누리든 민주든 우리 정치를 이끌고 있는 양대 정당은 이번 이석기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할 주체다. 좌파정권 10년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민주당 집권시절, 정치의 주체였던 민주당은 우리 사회에 이념적 이분법을 극대화 했다. 집권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든, 기득권에 대한 반발이든 민주당의 이분법적 정치는 좌파는 진보와 동일시됐고 종북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됐다. 어디 그뿐인가. 그 10년의 세월이 만든 수많은 좌파, 수많은 종북주의자들이 이제는 정치의 수면위에 올라 말간 얼굴로 국민을 향해 평화를 이야기 하고 독재를 이야기하고 민족을 이야기 한다. 새누리는 어떤가. 재집권한 보수 정당이 스스로 당당함을 잃어버리고 오래된 습관처럼 또다시 부패와 악수했다. 손바닥이 따뜻해지면 차가운 머리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좌파와 종북을 구분하지 못하고 종북과 '빨갱이'를 방치하며 세월을 보냈고 그 결과가 이석기로 드러났다.

 그런 새누리당이 이번엔 내란선동 혐의 등으로 구속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제명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법무부도 '위헌정당·단체 관련 대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통진당의 해산 심판을 헌법재판소에서 가려 보겠다는 뜻이다. 1989년 NL주사파 계열 운동권인 이석기 등이 이끈 '반제청년동맹'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재건 민혁당이 국회를 교두보로 삼으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수순이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늦어도 한참 늦은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는 축출해야할 대상이다. 건강한 좌파는 우리 사회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부패한 정치를 향해 뒷통수를 후려치고 나태한 정부에 찬바람을 불어준다. 그래서 건강한 좌파는 진보의 이름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체제 균형에 일정한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종북이고, '빨갱이'다. 사라진 '빨갱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늘 암약해 온 빨갱이 이야기다. 이석기는 지난 5월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집령이 떨어지면 정말 바람처럼 와서 순식간에 오시라. 그게 현정세가 요구하는 우리의 생활태도이자 사업작풍이고 당내 전쟁기풍을 준비하는데 대한 현실문제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시라." 바람처럼, 순식간에 와서 무얼하자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전쟁기풍을 준비하는 것이 현실인식이라는 대목은 섬뜩하다. 어떤 이든 스스로 '빨갱이'라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바람처럼, 순식간에 이 땅을 지켜온 정신과 혼을 붉게 물들이고 싶지만 깃발조차 파랗게, 혹은 노랗게 바꾼채 민족과 평화, 진보와 분배정의를 이야기 한다. 거친 언어, 선동적인 문장의 나열이 반복될 경우, 노란색이든 보라색이든 파란색이든 어쩌면 모두가 빨갛게 혼합돼 이 땅에 나붙낄 것으로 믿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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