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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엔 '2013 울산 미술관의 미래: 테크노 이미지네이션전'을 보러 문화예술회관에 다녀왔다. 한때 만화가를 꿈꾸다 재능의 한계를 절감하고 접었던 이력이 있는지라, 미술은 늘 동경의 대상이다. 그래서 중요한 전시회가 있으면 챙겨보려 애쓰는 편인데,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미래 미술의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전시회에는 주로 컴퓨터프로그래밍이나 기계장치 등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기술적 상상력'을 이미지로 표현한 작품이 많았다. 김기훈의 '허공의 둘레'란 작품을 보면 얇은 스틸판을 차곡차곡 양쪽에 쌓아놓고 스틸판이 돌아가면서 가운데의 빈 공간에 사람머리 모양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스틸판이라는 기계장치의 도움으로 허공이 캔버스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옥진명의 '흔적/댄서' 시리즈는 줄지어 선 나무·다리의 난간 등을 찍은 사진 작품이다. 풍경이 주는 찰나의 이미지를 고정시켜 흔적을 남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을 스마트폰의 안드로이드앱을 통해 다운받아보면 그 풍경 속에서 춤추는 군상이 나온다.

 풍경의 공간성이 테크놀로지의 시간성과 결합돼 시공간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처럼 미래의 술은 과학기술의 발달을 적극 수용해 캔버스의 무한한 확대를 꾀한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관람객의 참여이다. 전통적인 미술이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같이 관람객과 작품과의 '거리 두기'를 꾀했다면, 이번 전시회에선 관람객과 '함께' 만들어 가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Everyware의 'soak(스며듦)'은 어두운 방안에 놓인 하얀 캔버스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작품이다. 만져보면 놀랄 만큼 부드러운데 이것을 누르고 문지르다 보면 갖가지 색깔이 꽃처럼 피어난다. 마치 염색 천에
물감이 스며들 듯 캔버스가 관람객 손길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한진수의 'red blossom(붉은 꽃)'은 관람객이 기계장치를 불면 주스의 거품들이 날아가 캔버스에 붉은 무늬가 새겨지게 설치됐다. 처음엔 텅 비어있던 캔버스가 관람객의 활동으로 이미지가 생겨나고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예술 창작의 주체와 감상자의 경계가 지워지는 셈이다. 이젠 관람객 참여로 비로소 완성되는 '진행 중인' 작품이 꾸준히 나오고 있고 그것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 미술의 특징은 '경계 허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창작의 주체와 그것을 감상하는 감상자와의 경계가 지워지고, 시간과 공간의 분할이 지워진다. 미술과 다른 장르와의 결합이 시도되며 현실과 가상, 예술과 기술의 경계조차 모호하다. 이미 미술품은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아닌 거리에서, 집 안의 모니터에서, 스마트폰의 앱을 통해서 감상할 수 있다.

 물론 미술 작품의 경계 허물기는 이미 시도돼 왔다. 1917년에 마르셀 뒤상은 남자의 소변기에 사인을 하고 '샘'이란 이름으로 출품을 해 미술계를 충격에 빠뜨리며 예술품과 기성품 간 경계를 무너뜨렸고, 1963년 백남준은 '음악의 전시'라는 개인전에서 예술과 기술, 미술 작품과 소리의 융합을 꾀한 비디오아트를 처음 선보였다. 이후 온갖 다양한 기법의 실험적인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이젠 '새로움' 자체가 진부해진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 특히 미술은 지속적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이는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바퀴를 끊임없이 돌려야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은 필연적이다.

 전통적으로 작가가 무수한 연습을 통해 개성있는 선과 색을 완성해 갔다면, 이젠 번뜩이는 영감과 상상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롤랑바르트는 글을 읽을 때 독자가 텍스트를 재구성해서 읽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저자의 죽음'이라 표현했다.

    이는 미술 작품의 감상에도 해당될 뿐 아니라 창작의 영역으로까지 확대해 볼 수 있다. 갈수록 작품에서 작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고, 작가와 감상자와의 협력과 소통에 의해 완성되거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작품이 더 많이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는 시간에 관한 유명한 수수께끼가 나온다. 첫째는 방을 떠났고, 둘째는 방 안에 있으며, 셋째는 방으로 오고 있다. 미래를 의미하는 셋째가 없으면 첫째와 둘째, 즉 과거와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는 지금 오고 있다. 방문을 열고 문턱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미래의 미술은 바로 현재의 미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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