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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저쪽 선을 긋듯 계절이 바뀌었다. 올 여름을 견디면서 가을을 맞이할 수나 있을까 내심 조마조마 했다. 난생 처음 겪은 무더위였다. 언젠가부터 변해가는 우리나라 기후가 가을을 데려올 것 같지 않아서였다.

    고맙게도, 가을은 영화의 장면이 바뀌듯 뚜렷한 경계를 지으며 찾아왔다. 가을에는 어디든지 떠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려 견디기가 힘들다. 방랑벽은 세월이 흘러도 고쳐지지 않는 불치병이 됐다.

 구월이 열리자마자 강진의 다산초당과 땅끝 마을, 보길도를 다녀왔다. 한 여름 타던 목마름이 조금은 해갈된 듯 했으나 약발은 며칠 가지 않아 시부지기 기운을 잃었다. 그렇다고 마음 끌리는 대로 매번 집을 나설 수는 없는 일, 그럴 때마다 부초처럼 떠다니는 마음을 주저앉히는 방책이 있기는 하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여행 프로그램이다. TV 앞에 앉아 세계 곳곳의 비경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노블레스 노마드는 '귀족적 유목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명품이나 골동품 같은 물건을 소유하는 대신 여행이나 레저, 공연 관람 등 무형의 경험을 수집하는 새로운 소비자층을 말한다. '귀족적'이란 단어가 나와는 무관하게 느껴지지만 명품 가방이나 값비싼 골동품을 가지고 싶은 욕구보다 여행이나 좋은 공연 관람에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가 내 사는 곳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 챙겨서 다니곤 한다. 멋진 연주회의 여운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 기쁨 충만한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한참 나다닐 때, 함께 간 일행들이 공항의 면세점에서 명품을 사려고 기웃거릴 때도 관심이 없었다. 그 돈으로 다음 여행지를 생각하곤 했었다. 낯설고 신기한 것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은 나를 신세계로 이끌었다. 세상은 넓고 가 볼 곳은 천지사방에 널려 있었다.

 실크로드를 따라 혜초가 지나갔다는 타클라마칸, 그곳의 사막에서 바라보는 별은 유난히 크고 빛난다고 했던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바이칼 호수, 일주일 동안 끝간 데 없이 달린다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캐나다 옐로나이프의 오로라를 볼 수 있다면….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열망과 다녀온 곳에 대한 그리운 추억은 촉촉한 가슴으로 살아가는데 필요 충분한 에너지가 된다. 

 텔레비전 안에서 길을 걷고 있는 배낭 객이 마치 자신이기라도 한 듯 넋을 놓고 바라본다. 육신은 여기 있어도 영혼은 저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떠다니고 있다. 하늘빛과 물빛 그리고 풀빛이 저토록 매혹적일 있는 것일까. 자연이 가지는 고유의 빛깔은 사람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색감이다. 바라보기만 해도 위안을 받고 있는 기분 때문에 멋진 곳을 찾아 순간순간 길을 나서고 싶은 유혹에 빠져드는지도 모른다.

 '비색을 지닌 고려청자와 같은 보물을 줄까, 아니면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길 떠날 수 있는 여행비를 줄까'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을 택할 것이다. 말짱한 얼굴로 살고 있어도 누구나 말짱하지 않다는 걸, 언제나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걸 안다. 앞앞이 말 못하는 살이의 버거움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유목민처럼 떠돌고 싶어진다.

 사람은 추상명사로 살아간다고 한다. 샤넬가방이나 고려청자와 같은 고유명사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외로움, 그리움, 사랑, 행복, 추억과 같은 명사로 삶을 꾸려간다. 추상명사 속에는 보이지는 않으나 수북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 이야기들이 살아가는데 버팀목이자 생을 이어가는 징검다리가 아닐까 싶다.

 길을 걷고 싶다. 길 위에서 만나는 많은 것들과 눈 맞추고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저 자연인 듯 그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 유한한 시간 앞에서 얼마나 유효한 시간이 내게 남아있는지 헤아려 보면서 오늘도 내 곁에 있는 배낭을 끌어당긴다. 언제가 될 지 기약 없는 여행 준비를 해 놓는다. 불현듯 떠날 수도 있기에 나의 배낭은 '5분 대기조'다.

 가을,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무작정 떠나고 싶다. 이 풍진 세상을 잘 견뎌내려면 떠나고 싶을 때는 떠나야 할 것 같다. 내게 썩 어울리지 않는 '귀족적'이란 단어를 살짝 들어내 버린다. 나는 천생 '서민적 유목인'이 틀림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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